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인권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존엄성과 가치 인정이유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에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되는 존엄성과 가치성을 부여했다(창세기 1장). 또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성을 강화한다. 반면, 창조주와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는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성의 근원을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인권의 근원을 국가에서 찾게 되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 이것이 인권에 관한 논쟁의 근원이다.

인권을 논하는 사람들은 인권의 본질이 자유와 평등에 있다고 말한다. 자유는 자기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관적 권리로 제한이 없는 방종과는 구별된다. 의무의 동반 여부와 실행 가능 여부를 기준으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로 구분한다. ‘형식적 자유’는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유다. 방종과 구분하기 위해 제한을 두고 있다. 담배를 피울 자유도 있지만 맑은 공기를 마실 자유도 있다. 형식적 자유는 항상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즉 담배 피울 자유가 있지만 비흡연자의 맑은 공기를 호흡할 자유를 위해 공공장소에서는 금연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실질적 자유’인데, 해외여행의 자유와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요구되는 의무는 없지만, 시간적, 경제적, 육체적으로 자유를 누리기 위한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떤 자유든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자유와 충돌할 때는 더욱 제한되어야 하며, 그 제한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자유를 제한할 때는 1) 목적이 정당해야 하며, 2) 제한하는 수단이 적합해야 하고, 3) 자유의 제한 정도를 최소화해야 하고, 4) 제한의 목적과 자유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법익의 균형성이 필요하다. 이상 네 가지 원칙 중 하나라도 위배하면 과도한 자유의 제한으로 비판받게 된다.

평등에도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이 있다. 인간 사이에는 절대적 평등이란 불가능하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평등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그의 법 앞에서의 평등,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같은 것을 같게 대우하고,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는 상대적 평등이 성경이 말하는 평등이다. 기독교는 절대자인 하나님이 제시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에 근거한 평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없는 무신론자나 범신론자는 자기 나름의 가치관이나 이념에 근거한 평등의 기준을 주장한다.

평등의 두 번째 구분은 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이다. 법적 평등은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특히 하나님의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법을 어긴 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법을 지킴으로써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하나님이 명하신 창조/문화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다. 법적 평등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동등한 기회를 받고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상대주의자들은 기회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이미 주어진 사회경제적 출발점부터 같아져야 함을 주장한다. 어떤 이는 금수저를 다른 이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어떤 이는 높은 지능을 다른 이는 낮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떤 이는 좋은 육체적 조건을 다른 이는 열악한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들에게 어떻게 출발점을 맞춰줄 것인가? 결국 출발점을 똑같이 맞춰줄 방법이 없으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실질적 평등’은 결과의 평등까지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회정의’가 주장하는 평등의 핵심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면서 “인간은 자유 속에서 평등을 갈구하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면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 상태에서라도 평등을 찾게 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출발점을 같이 맞추려 노력했던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했던 국가들은 모두 실패했다. 이는 인위적으로 모든 면에서 평등을 맞추려는 노력은, 하향평준화로 갈 수밖에 없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순진한 이상주의이며, 인간의 창의력과 근면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나쁜 점만을 바라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보수정당은 자유를, 진보정당은 평등을 더 소중한 가치라고 서로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는 힘들고 자유와 평등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룰 때라야 인권이 견고하게 지켜질 수 있다. 반면 성경에서 인간과 인간 간의 평등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다. 또 성경에서의 자유는 개개인의 권리로서의 자유보다는, 한 인간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인권은 그분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것(렘 22:3)이며 그 법 아래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요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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