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물 좀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시작된 대화,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더니 사마리아 여인의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으로까지 발전했다. 처음에는 ‘유대인 남자’로 보였지만 “야곱보다 더 큰 이”라더니 이제는 “선지자”라 한다. 더이상 까칠하게 굴지 않는다. 그리고 진짜 목마른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드디어 마음속의 진짜 갈증을 얘기한다.

하나님과 예배에 대한, 진실된 삶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절), 여전히 전통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래도 방향을 잘 잡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제사를 드리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그저 종교의 보호를 받으려 한 것일 뿐, 만족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제사가 혹시 잘못된 것인가요?” 물은 거다.

둘 사이의 대화의 초점인 ‘예배’를 “삶의 오아시스”라는 제목으로 생각해본다. 오아시스, 사막이지만 지하수가 솟아나 식물이 자라 주변에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고, 교통이 발달하여 사막의 중심지를 이룬다. 또 사막을 지나는 대상들의 휴식처나 상품 거래 장소도 되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 오아시스가 삶의 중심이듯 예배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출애굽의 목적, 구속의 목적이었다. 예배 성공이 곧 모든 것의 성공이라는 자세여야 한다.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나?

나름대로 예배는 드렸지만 아무 희망도 없고 행복도 없는 사마리아 여인, 인생이 사막화되었는데 우리는 어떤가? 혹시 사막화되는 듯한 느낌 들지 않나? 예배 부재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배 홍수 시대, 그런데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방송국이 웅장하고 라디오가 멀쩡하면 뭐하나? 주파수가 안 맞는데. 홍수 후에 식수가 모자라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예배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 했다. 아벨은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의인 아벨’이 되었다. 순교자된 것만 생각하지 말라. 죽는 건 누구든 피할 수 없고, 언제 죽으나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예배 때문에 ‘의인 아벨’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지금 삶의 오아시스 같은 예배, 진짜 예배를 드리고 싶다. 그래서 예수님께 오아시스의 모양만 있지 실제로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신기루 같은 예배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갈증을 속시원하게 해소시킬 만한 삶의 오아시스인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 곧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이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 곧 예루살렘 성전에 있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21절)고 하셨다. 그리심 산(Mt. Gerizim)의 예배도, 예루살렘 성전(בית המקדש, 바잍 하미크다쉬, 거룩한 집)의 예배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3장에서 니고데모가 질문하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을 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우리에게 주시는 답이기도 한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다. 주파수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영은 프뉴마(πνεύμα), 바람이라는 뜻, 근원도 알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 때 했던 기도를 기억하나?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나님은 성전 안에 제한받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했다. 어디에서 예배드리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핵심은 영의 임재일 것이다.

그리심 산의 예배? 모세오경만 알 뿐 선지서도 읽지 않고 시편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였을 뿐이다. 영적 지식이 제한된 사람들, 열광적인 예배를 드렸을지는 몰라도 부분적 진리만 고수하는 예배,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를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BC 20년부터 AD 63년경까지 지었으니 80년 넘게 지은 어마어마한 성전이다. 가로 500m, 세로 30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 얼마나 화려했던지 헤롯 성전을 보지 않은 자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것 같다. 당시는 도시마다 거대하고 화려한 우상의 신전들로 가득했다. 에베소의 아데미, 곧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높이 16m, 직경 1.8m에 이르는 대리석 기둥 100여 개가 떠받치는 신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4배 규모였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기죽지 않고, 그 신전들은 그저 우상의 전당일 뿐이지만,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는 성전이라 했다.

항구도시 고린도, 뜨내기들이 북적거리고 비린내나는 곳, 그 고린도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은 텐트 만드는 작업장을 겸비한 가정교회, 대략 20명 정도 모였던 것 같다. 거기서 올겨간 디도 유스도의 집도 아굴라의 집보다는 조금 더 컸지만 많이 모일 공간이 아니다. 가정교회가 된 회당장 그리스보의 집도 엘리트층과 특권층의 개종에 영향은 끼쳤지만 그 집에 모인 숫자도 소수였다. 스데바나의 집, 가이오의 집, 에라스도의 집도 죄다 10~2,30명이 모여 예배드렸을 뿐이다. 변변한 건물도 없어 상가의 한 귀퉁이에서, 또는 가정집의 좁은 거실에서 예배드린 것, 이곳을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드린 예배가 그들에게 삶의 오아시스였기 때문이다.

장소가 문제 아니다. 크고 화려해도 영의 임재가 없으면 성전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그동안 너무 건물 중심, 교회당을 오아시스로 생각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이 많아진 게 좋기도 하지만 건물도 아니고 많이 모이는 사람도 아니다. 영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 그 ‘자세’라고 하셨다.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 두 단어지만 의미는 하나다. 진리가 영을 수식한다. 진리의 영이란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요한복음 14장의 고별설교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하셨다. 진리란 요한복음에서 ‘실상’, ‘실체’를 뜻한다. 가짜나 허위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진짜 예배라는 뜻이다.

우리 예배도 가짜일 때가 있다. 자기만족의 예배, 자기위안의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니다. 어떤 부자의 회갑 잔치를 앞두고 그 집에 있는 동물들이 회의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주제는 “이번 잔치에 누가 순교할까?”, 제일 먼저 개를 보고 말했다. “야, 이 여름에 주인을 위해 잔치하는데 네가 보신탕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냐?” 그러니까 개가 “나는 나가는 건 괜찮은데 내가 가면 이 집 재산은 누가 지키냐” 생각해보니 개는 안 되겠다며 닭에게 “닭아, 이 여름에 삼계탕이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주인을 위해 네가 순교해라” 그러니까 닭이 “내가 없으면 주인이 일어날 시간을 누가 알려 주냐? 그리고 매일 영양분 보충도 생각해야지. 내가 알을 낳아야 되지 않겠냐?” 닭도 안 되겠다 싶어 소한테 “야, 네가 아무래도 갈비로 대접하는 게 제일 낫겠다, 잔치에 소고기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소가 “나는 안 되지, 내가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냐?” 마지막 돼지에게 “야, 돼지야 너는 뭐 별일이 없지? 삼겹살로 대접해라.” 그러니까 돼지는 할 말이 없다. 왜? 그냥 사니까. 사명이 없다. 그냥 살진 것외에는... 그러니까 돼지가 그러더란다. “그럼 물 끓이소”

자기 생각만 하면 안 된다. 예배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 그래서 예배는 경축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축이다. 그리고 예배는 영접이다.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접이다. 또 예배는 드림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제물로 드리는 거다. 그리고 예배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 자체가 예배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구절을 이전 개역성경은 영과 진리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했다. 대표적인 오역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오류가 남아 있다. 신령스럽게 드린다고 거룩한 흉내내고, 기도나 설교의 말투도 근엄하게 하려 했다. 설교 강단은 신령스러운 곳이라 신을 벗어야 했고 높게 만들었다. 드럼과 전자악기 사용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진정으로 드린다며 예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주일이 되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헌금도 신권이나 깨끗한 돈으로 봉헌하였다. 정성을 중시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물론 정성도 귀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인간의 정성이나 노력이 아니다. 잘못하면 그 정성과 노력이 인간적 의가 되어 은혜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 그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다.

또 ‘진정’이 아니라 ‘진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하는 예배여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정성? 안 받겠다는 말씀이다. 마당만 밟는다고 하셨다. 삶의 오아시스는커녕 신기루 같은 예배라는 거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삶의 오아시스 같은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다. 이게 진리의 예배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며 예수님이 진리의 본체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했다(14:6). 그렇다면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게 진리의 예배이고 영의 임재가 있는 예배다. 예배는 성경공부도 아니고, 좋은 강연도 아니다. 정치강연인지, 심리상담인지, 자기개발 집회인지, 만담인지 모르는 설교도 많다. 설교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야 한다. 그래야 영의 임재가 있는 예배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예배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하나님이 한탄하셨다. 예배하라고 해방시켜준 사람들이 예배를 잊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숭배본능이 있다. 해, 달, 별, 나무, 바위, 산, 바다, 짐승 그 외에 닥치는 대로 신을 만들고 숭배한다. 하지만 예배 대상이 중요하다.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 있다고 하고, 인도에는 1억의 신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한국에도 8만 8천의 신이 있다고 한다. 엄청나다. 『성서는 변혁이다』(The Bible in Human Transformation)라는 책을 펴내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라고 했다. 하나님은 많은 신 중 한 분이 아니라 창조주,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예배자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을 받았던 A.W. 토저는 “하루를 예배로 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마귀가 건드릴 수 없다”고 했다. 새벽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던 다윗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였고 또 인정받는 왕이 될 수 있었다. 새벽 기도를 드리거나 QT, 정말 조금만 성의가 있어도 할 수 있다. 기억하라. 예배의 문을 열면 하늘의 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면 반드시 축복이 따를 것이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예배를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 아내와 사랑에 빠졌을 때 끊임없이 그녀 생각만 했다고 한다. 아침 식사할 때도, 수업 중에도, 슈퍼마켓에서 줄 서 있을 때도, 차에 기름을 넣을 때도 그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혼잣말을 하기도 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기에 몇백 km 떨어져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언제나 서로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했다. 그렇다. 예배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거다.

성경은 말한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 그 날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예배는 삶의 오아시스, 경건함과 더불어 이런 즐거움과 기쁨 속에 최고의 예배를 드리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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