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교수
채영삼 교수(백석대)

신학생들을 가르칠 때, 아니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서 가르칠 때,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 늘 그런 장벽에 부딪힌다. ‘기초’가 없다는 생각 말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언약의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전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성경을 구약과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구약 성경이 어떻게 신약을 통해 펼쳐지는지 그 접점을 찾을 수도 없고,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분간할 수도 없다. 그런 기초가 없이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뿌리 깊게 그리고 풍성하고 의미 있게 다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강의를 하다 말고, 다시 가장 기본적인, 계시 개념, 하나님의 행동 계시와 말씀 계시, 그리고 언약,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된다. 강의하다 곁길로 가는 셈인데, 그래도 그런 기초적인 내용이 숙지되지 않으면, 그 위에 세우는 가르침들은 사상누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오늘 날 많은 신학교들, 보수신학교들에서도 '신약'성경을 가르치면서 ‘계시’ 개념이나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을 가르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신약학 분야는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비평학의 지대한 영향 아래 놓여 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공헌한 바도 많은 역사비평학적 접근은, 근대 이후의 신약학의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약성경을 보아왔던 그 ‘언약적’ 그리고 ‘새언약적 관점’은 잘 가르쳐지질 않게 되었다. 신약학은 여러 분과로 파편화되어, 과연 통일성이 있는지, 일관된 주제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이 파편화된 채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이 부분적이고 파편화된다는 것을 뜻하고, 복음이 제한적이고 축소된다는 것은, 그 복음으로 살아야 하는 ‘새 언약 백성’인 교회의 자기이해와 전망이 축소되고 파편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그 뿌리에서부터, 그러니까 구약에서부터 오는 계시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펼쳐지는 꽃과 열매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뿌리를 가지면, 그의 설교는 견고하고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새 언약’이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제대로 답변하는 신학생도 목회자도, 그리고 물론 성도들도 찾기 어렵다. 오늘 날, ‘새 언약’이나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진리는, 주류교회가 아니라 이단들이 가져가 왜곡, 변질시켰다. 사실, 교회로부터 새 언약의 성취의 복음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을 빼앗고 희석시킨 것은, 근대 이후 파편화된 신약학의 방황이 그 원인 중에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복음의 회복’이 있고, ‘교회의 견고한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써야했던 책이 (새 언약의 성취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본) <신약성경의 이해>이다. 신약성경이 무엇인지 ‘그 기초와 근간’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성취된 결과로, 우리 즉 ‘새 언약 백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주어진 ‘복음’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초 위에, 복음서 신학, 바울 신학, 공동서신 신학, 요한 신학 등, 각 권의 신학들을 연구하고 그 위에 세울 수 있다. ‘새 언약’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이해가, 교회 안에 널리 퍼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교회가, ‘새 언약의 성취’나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너무나도 귀한 복음적인 주제들을, 교회를 갉아먹는 이단의 손에서 온전히 빼앗아 오기를 기도한다. 거기에 이 땅의 교회가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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