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교회 강성림 목사

한국과 미국의 이혼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기독교인의 이혼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성경은 이혼을 금하고 있지만 최근 이혼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 대두되면서, 기독교 내에서도 이혼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 일반화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물론 결혼생활만을 잘 유지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혼했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혼은 부부간 사소한 갈등이나 성격 차이로 인해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혼'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할까? 평안교회 강성림 목사는 주일 설교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의 근본 원칙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긍휼과 자비를 잘 설명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다. 이에 설교 전문을 게재한다.

(마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결혼 내에서 갈등과 헤어짐의 문제는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문제였을 뿐 아니라, 산상수훈의 한 주제로 나타날 만큼 신앙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혼은 산상수훈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의 유대 사역에서의 가르치심에서도 나타납니다.

마 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문제를 들고 온 것을 보니, 이혼 문제가 예수님 시대에도 예민하고 잘 못 다루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이혼 문제는 설교의 주제로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입니다. 말을 잘 못하면 상처가 되고, 서로 들추고 싶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우선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는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합리성과 정당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으면"이라는 조건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소위 "상황 윤리"를 따지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안 된다" 하면 "항상 안 되느냐?" 며 따지고 들어가 절대성을 무너뜨립니다. 아십니까? 이것은 사단이 잘 쓰는 접근 방법입니다.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 하셨는데, 사단은"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먹지 말라"에 집중하게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어떤 이유가 있으면, 이혼을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혼에 대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에 대해 논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힐렐 학파 바리새인들은 여자가 음식만 못 해도 이혼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샴마이 학파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해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논쟁 가운데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만약에"라는 조건을 달면서 극단적인 예에 자꾸 집중하여 말을 만들어냅니다. 도저히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상황을 자꾸 일반화하고, "그러니까 괜찮다" 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자세는 바로 "본래"로 "근본"에 집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 19: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본래 本來, 원래 元來, 본시 本是, 결혼의 근본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다 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내에게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이 하나님의 결혼의 언약이십니다. 언약 가운데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결혼하셔서 한 몸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들어가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셔서 한 몸이 되셨다면 하나님이 내게 정해주신 다른 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민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함께 들어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들어가시기 전에 고민하시고,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들어가면 그 때부터는 "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짝이 맞을까?" 고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논리와 하나님의 논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논리에 따르면 이혼은 본래 근본적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신명기 24:1-2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신 24:1-2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이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세주처럼 반겼습니다. "수치 되는 일"에 대한 해석을 자기들 마음대로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대로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으니까 이혼하자" 이렇게 말씀을 자기들 입장에 맞춰 적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이혼 사유처럼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들어 합의이혼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당신하고는 행복할 수가 없어" 하며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본래"를 말씀하십니다.

마 19: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이 허락된 것이랍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4:1의 "수치 되는 일"을 "음행"으로 못을 박습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산상수훈과 유대 사역의 가르침 모두에서 동일하게 이혼은 "수치 되는 일" 곧 "음행한 이유"만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 하십니다.

마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신명기 24:1의 말씀에 나오는 말씀을 예수님의 풀이대로 해석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결혼하여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함께 나아갔는데, 음행한 일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런 일 때문에 도저히 못 견디고 그를 받아줄 수 없으면 이혼증서를 써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라는 법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본인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결혼을 해도 간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내가 깨고 다시 결혼을 하면 나는 간음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정욕과 죄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의미와 뜻을 생각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죄와 허물에 대해 핑계하고 변명하도록 사용하는 것은 더 큰 죄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실수와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요 8:3-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이자고 그 여인을 고소했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요 8:6-8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고소와 정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태도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양심을 두들겼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사납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났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여인은 예수님께 잘못을 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여인은 사람들의 고소와 정죄로 자신의 잘못을 죽음 앞에서까지 직면했습니다. 그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땅에 무엇을 썼을까?'가 아니라,'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음란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다시는 음란한 죄를 범하지 않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 이혼하고 여섯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역시 정죄하시지 않으십니다. 정죄함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입장은 분명히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음란과 간음과 이혼에 대해 심지어 동성연애와 같은 어떤 죄에 대해서 우리는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를 만나야 해결된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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