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랑스 교육처럼>이란 책을 선물 받아 읽게 되었다. 프랑스식 교육법에 대해 잘 소개해 놓은 이 책의 내용 중 프랑스의 음악교육을 소개하는 한 예화에서 어느 아마추어 플루티스트 할머니가 한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
할머니 왈 "나는 가끔 1968년 이전의 프랑스가 그리워요. ... 1968년 이전에는 사람들끼리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어요. 자녀들도 부모에게 존댓말을 썼죠. 절제가 있었고 예의가 있었는데 현재의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요."
맞다. 1968년 5월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젊은이들의 사고체계를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유럽의 전통과 관습, 특히 기독교적인 정신 유산을 송두리째 거부하기 시작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움직임이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었고, 지금 대한민국 땅에 상륙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성적인 일탈을 권리로 만들고, 부모와 교사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멋진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마추어 플루티스트 할머니의 탄식처럼 사람들의 말이 거칠어지고, 삶 속에서 절제와 예의가 사라진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 세계가 인격의 '고상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최근 한 성공회 신부가 대통령이 외국 순방하는 동안 비행기 사고로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여과 없이 SNS에 내뱉었다가 사제직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영부인이 캄보디아의 가난한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빈곤 포르노'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더러운 말로 폄하한 정치권 인사도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기에 자기 혼자 나라님을 욕하던, 무슨 말을 하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이 개인의 사적공간을 넘어설 때는 자유에도 책임과 한계가 따른다. 사제는 사제로서 지켜야 하는 절제와 품위의 수준이 있고,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는 그런 절제와 예의가 실종된 지 오래인 것 같다.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하수인쯤으로 폄하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의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 쌓아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어느 순간 대한민국에서 좀 배웠다는 지성인들, 자신을 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의식 있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배설물처럼 쏟아내는 분노와 증오, 천박함이 가득 차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수준임을 자꾸 확인시켜주는 사건들 때문에 요즘 무척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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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