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의 사랑을 연단하신다.

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믿음과 순종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 잇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나의 확실한 믿음과 순종은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으로부터 나온다.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때,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만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 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기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놀라지 마시라. 바로 고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도대체 하필이면 왜 고난인가? 지금 내게 시급히 필요한 돈을 주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토록 바라는 성공을 주시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고난인가?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달라는 대로 아버지가 다 주셨을 때 이 아들이 “아빠는 진짜 나를 사랑하셔”라고 생각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 길로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창녀에게 다 갖다 바쳐 버렸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탕자는 오직 자신의 욕망을 사랑했을 뿐이고, 그 욕망을 위해 아버지를 사용했을 뿐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용”했을 뿐이다.

내게 필요한 돈을 주시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 같은데, 내게 필요한 건강을 주시면, 내가 바라고 원하는 소원을 응답해 주시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아신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용만 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으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그림 가운데 “돌아온 탕자”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유명한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에서 아주 특별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돌아온 아들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손”이다.

이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은 “아빠의 손”과 “엄마의 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손이다. 아빠의 힘과 엄마의 정, 아빠의 권위와 엄마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은 아빠의 손과 엄마의 손이라는 상반된 성품의 조화를 통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설교와 예배, 기도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시는 “따뜻한 은혜”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은 고뇌와 크고 작은 시련들, 즉 “뜨거운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뜨거운 고난”을 통해서 전달된다. 고난 가운데 들리지 않던 설교가 들리기 시작하고, 고난을 통해서 기도가 간절해지고,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경험하게 된다.

고난은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가 우리 삶에 흘러 들어오는 길이요 통로인 것이다. 아버지의 거친 손길을 통해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우리에게 달콤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인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의 그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나 돼지들 틈 속에서 “개고생”을 당했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변화될 수 있었다. 탕자의 고난이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는 탕자의 고난 안에는 아버지의 분명한 뜻과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탕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유산을 작은 아들에게 내어줄 때 그 아들이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몰랐을까? 다 알고 계셨다. 다 아시고도 허용하신 것이다. 즉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신 사랑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 아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 고난을 감수하신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만큼 아들의 고난은 그 아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었다.

(예: 말 안 듣고 고집.. 붙잡아 준다는데 혼자 하겠다고 뻐팅기면서.. 그럼 그 때 어떻게 해요? 그래.. 네 맘대로 한번 해봐라. 아버지는 그 아이가 그것을 혼자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지 맘대로 해보게 내버려둔다. 그래서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고통이 죽을 정도만 아니면 고통이 강할수록 도움이 된다.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붙어 있을테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고난이 필요한 이유는 순전히 우리의 “고집스러운 죄성”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하며, 자기 사랑에 함몰되어 있는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탕자들이기 때문에 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아버지만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없는 삶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고난을 통해 자신이 아들이라 불릴 가치 조차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 비로소 나같은 죄인을 아들로 받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신앙생활은 바로 고난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믿게 된다. 지난 주에도 나눈 것처럼,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은 “온전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데,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더욱 온전한 사랑, 그래서 더욱 온전한 믿음의 순종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끝)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