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6.25 전쟁과 한국 기독교(대한민국의 수호)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반도 남부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것이고, 이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반공을 중요한 가치로 삼은 정치체제의 수용이다. 이것은 개항이후 개화세력이 꿈꾸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이같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반도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남한만의 국가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 남한의 민주국가성립과 후 통일민주국가 건립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입장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개인의 소유를 부정하고, 인민혁명을 주장하는 인민공화국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한반도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북한만의 국가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1948년 분단체재의 성립은 자체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한반도에서 무력이라도 통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은 바로 북한이었다. 이미 김일성은 해방 직후부터 민주기지론을 내세워 북한을 먼저 공산화한 다음에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실질적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고, 1948년 2월에 이미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1948년 9월 인민공화국 수립 연설에서 소위 국토완정을 강조하였다. 이런 기반 위에서 김일성을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남한의 이승만은 북진통일이라는 명분만 있었지 실제로는 북한을 향해 무력으로 도발할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염려하여 무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1949년 6월에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1950년 초 미국무장관 애치슨은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이런 상황은 소련과 북한을 오판하게 만들었고, 결국 6.25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6.25 전쟁은 38선을 휴전선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경계선으로 바꾸어 남북의 분단체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한 민족의 견지에서 가장 큰 비극이다. 하지만 이런 비극 가운데서도 6.25는 한반도에 몇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6.25 이후 한국사회는 분명하게 서구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한반도에 서구문명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것은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에는 일본, 소련, 중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은 그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내에는 유교적인 친중세력, 친일세력, 러시아의 공산세력이 있었고, 서구 기독교세력은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6.25전쟁이후 한반도에서 이런 다른 세력은 많은 힘을 잃게 되었고, 서구 기독교세력이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휴전선은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막아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고, 일본문화는 역사의 중심에서 쫒겨나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서구문화의 종속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6.25는 한반도를 대륙과 동북아 질서에서 벗어나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서구 기독교문화에 편입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기독교는 성장하게 된 것이다.

둘째, 6.25 이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다. 사실 1945년과 더불어 만들어진 38선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한반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6.25 전쟁 동안에 남한은 자유민주세계에 속하게 되었고, 공산주의 세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틸리(Charles Tilly)가 말한대로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든다.” 휴전선은 이제 분명한 국경선이 되었고, 휴전선 이남에서 공산주의는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특별히 1950년 6월에서 9월까지 남한 사람들은 실지로 공산주의를 체험하였고, 1950년 10월에서 11월까지 북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체험하였다. 이런 체험 가운데서 국가에 대한 선택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다. 이런 경험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재를 공고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6.25 이후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해방공간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사회의식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된 자본주의를 선호했다. 유교적인 멘탈리티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승만은 건국 이후 농지개혁을 통하여 농민들을 땅의 소유자로 만들어서 개인의 소유의식을 갖게 해 주었지만 일본의 적산을 유업으로 받은 기업은 여전히 국유화 상태였다. 또한 1948년 헌법에는 사기업에도 근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이익분배균점권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 대해서 헌법을 자유시장경제에 맞도록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반영되어 1954년 헌법이 개정되어 기업을 민간인에게 불하해서 국가의 통제보다는 민간주도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1948년 자유민주주의는 확립되었지만 시장경제가 확립된 것은 1954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한민국의 체재는 6.25의 종전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신생 대한민국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우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독교를 통해서 한미관계가 공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후 남한에서 미군은 철수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떠난 빈 자리에 새로운 미국인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였다. 특별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서 중국에서 추방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고, 이들은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들은 미국 본토의 국민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의 위협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미국에 북한의 남침을 알렸고, 이것은 미국에서 참전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한국전쟁을 공산주의와의 이념전쟁으로 이해했고,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월드 비전의 창시자 밥 피얼스(Bob Pierce)와 같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전도와 구호활동으로 한국과 미국은 단지 정치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연대하게 되었다.

6.25 전쟁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는 가장 강력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보루가 되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집단은 기독교였고, 따라서 1950년 6.25의 발발시에 북한에서 기독교는 거의 전멸되었다. 이런 북한은 남한에 와서도 기독교를 박해했고, 기독교는 공산주의의 적대세력이었다. 이것은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 남한의 공산주의와 가장 강력하게 싸운 집단은 바로 각 지역에 속한 교회였고, 교회목회자들은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이었다. 6.25 전쟁 기간에 북한에 의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도 바로 교회였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신생 대한민국과 운명을 같이하는 종교가 되었고, 이런 성향 때문에 정교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거의 국민종교(national religion)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6.25 전쟁 가운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6.25 수복 후 많은 좌익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자신이 전향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6. 25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의 피해로 인한 고아, 과부,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미국의 각종 단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월드비전, 컴패션,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그런 단체들이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는 각종 계몽운동에 나섰고,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세웠다. 이런 사립학교를 통해서 기독교교육과 민주주주의 교육을 시켰다. 기독교사립학교들이 대한민국 교육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선교부를 배경으로 한 것도 있지만 순수하게 한국 기독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시작된 것도 많았다. 아울러 한국기독교가 의료활동에 기여한 것도 중요하다. 일본의 패망 이후 일본의사들이 철수하였고, 그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기독교학교에서 훈련받은 기독교인 의사였다. 필자는 6.25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사회복지, 교육, 의료분야에서 유사정부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1960년을 전후해서 한국 기독교는 중대한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기독교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의 주류교단들은 WCC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와의 대화에 나섰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대립된다고 생각했던 한국기독교는 WCC 내에 러시아정교회와 중공 기독교가 가입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를 놓고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의 주류교회와 손을 끊고, 미국의 극단적인 근본주의단체와 손을 잡게 되었다. 또한 좀 더 온건한 그룹은 미국 주류교회와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한경직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이나 밥 피얼스와 같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미국교회의 원조단절에도 불구하고 반공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다시 말하면 많은 한국교회들은 자신들의 모교회와는 달리 보수/복음주의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현재도 한국 기독교는 미국교회의 주류와는 달리 반동성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런 한국의 복음주의교회는 미국의 복음주의교회와 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6.25 전쟁 이후 두 가지 방향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본다. 첫째는 산업화에 미친 기여이다. 한국 기독교는 각종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이것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과 함께 한국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중요한 일을 감당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이 강하게 일어날 때, 한국 기독교는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흥운동은 민주화시대에 맞는 리더쉽을 개발하지 못하여 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둘째는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산업화는 각종 사회문제를 가져왔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종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한국의 진보교회가 기여한 점이 크다. 특별히 유신독재에 반대하였다. 이런 민주화운동은 한국이 독재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고 본다. 하지만 이 민주화운동의 일부는 반미, 종북운동으로 변질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남한의 독재는 비판하면서 북한의 독재는 묵인하는 모순을 갖게 되었다. (계속)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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