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가 십자가라면 가나안은 부활이다. 십자가의 반대가 부활이 아니듯, 광야의 반대도 가나안은 아니다. 광야와 가나안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 서로 이웃하고 있다. 광야 안에도 가나안이 있고, 가나안 안에도 광야가 있다. 광야와 가나안은 십자가와 부활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를 거쳐야만 부활에 이를 수 있듯이, 광야를 거쳐야만 가나안에 이를 수 있다. 십자가가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광야도 벗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 안에 은혜와 축복이 담겨 있듯이, 광야 안에도 은혜와 축복이 담겨 있다. 십자가가 실패와 저주 같아도 축복인 것처럼, 광야도 실패와 저주 같지만 실상은 축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셨듯이 우리도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꿈꾸는 가나안에는 가뭄과 기근을 모르는, 사시사철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주는 나일 강이 있어야 하고, 애굽에는 요단 강 같은 강밖에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가나안에는 개울보다 조금 큰 요단 강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나안에서는 애굽처럼 강에 의존해서 살 수 없다.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 가나안에서는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천수답(天水畓)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고, 비를 내려 주지 않으면 광야가 되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다.
이진희 - 가나안에 거하다
나는 우리를 종종 당혹스럽게 만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는 어구의 참된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살피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구는 사실 하나님을 겁내거나 무서워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내 목표다. 오늘날의 사회가 건강한 두려움의 합당한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므로, 우리 문화는 필연적으로 더욱 신경증적인 상태가 되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불안해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따스하고 자애로운 섭리와 돌보심에 의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도덕성과 실재가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철저한 불확실성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는 두려움은 경건의 정수인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시는 새 생명의 본질이다. (중략) 그것은 우리의 죄악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감정이며, 우리가 영적인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도록 하는 감정이다. 하나님을 향한 이 감미롭고 전율에 찬 경이감 가운데 자라 갈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천상을 맛보게 된다.
마이클 리브스(저자), 송동민(옮긴이) - 떨며 즐거워하다
이 책은 신자들의 다양한 신앙 고민들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함께 이야기 나눈 것입니다. 이 질문들은 신학이나 사상 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는 작고 사소한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풀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질문들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질문들을 대하기에 앞서 몇 가지를 먼저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 마음속에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이분법이 있습니다. 우선 이 이분법에 따른 판정을 넘어섭시다. 그러면 우리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의 구별을 다 통과하여 도달하게 되는 진전된 이해와 실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왜 현실이 고단한가' 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것이고 우리는 선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신앙을 인과응보로 설명하려는 것은 너무 일차적입니다. 은혜와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복음은 크고 깊은 것이어서 이 내용은 언제나 감사와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감사와 찬양은 고난을 면제해 주실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실패와 후회를 무대 삼아 펼쳐지는 작품이 있음을 깨달을 때, 감사와 찬양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실하심을 더 크게 기대하십시오.
박영선, 윤철규 - 미안해, 잘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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