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개혁주의 영성신학

1. 개혁주의 영성의 목적

1) 하나님의 영광

②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종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복종적 인간’은 완전한 인간 이상이며, 그 모본은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삼위일체이시면서도 그의 지상생애는 성부(聖父)께 대한 복종(요 17:4)으로 특정 지어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의 복종’를 벤치마킹(benchmarking)합니다.

물론 그의 복종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게 성부를 만족시킨 ‘구속적 복종(obedience for redemption)’이었으며 우리는 다만 그의 ‘복종적 태도(obedient attitude)’를 우리가 유추적(類推的)으로 따를 이상으로 삼습니다.

개혁주의 변증학자 코네리우스 반틸은 그의 ‘교육학 논문’에서 기독교 교육의 목표로서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께 대한 유추적 행위(Analogical action)를 하는 자(Berkhof & Van Til, Foundations of Christian Education) 곧, ‘믿음의 복종자’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복종’이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적 자유자(creatural freeman, 무제한의 ‘하나님의 자유’와 구별된)‘가 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복종을 통해 피조적 자유자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소원과 능력을 가졌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환영하므로 최종적이며 완전하게 달성된 존재의 자유에 도달하게 됐을 것이다(Berkhof & Van Til, 앞의 책).”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한 “주께 속한 자유자(the Lord's freeman, 고전 7:22)” 개념과 일치합니다.

나아가 이 ‘복종’은 ‘그리스도만이 바칠 수 있었던 ‘구속적 복종(obedience for redemption)’이나 ‘행위구원자들’의 ‘율법주의적인 복종(legalistic obedience)’과는 구분되는, 믿음의 열매로서의 ‘복음적 복종(evangelical obedience)’입니다.

또한 ‘믿음’이 가진 ‘복종의 속성(attribute of obedience)’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복종’이라는 점 역시 간과돼선 안 됩니다. 사실 이 점이 ‘믿음의 복종(the obedience of faith Conduct)’을 독보적으로 만듭니다.

‘행위의 복종’은 강요에 의해 억지로라도 가능하지만 그것(믿음의 복종)은 자발적인 의지의 굴종으로만 가능하며 그것은 순전히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적 복종(your professed subjection unto the gospel of Christ- KJV 고후 9:13절)’으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교만한 마음의 파쇄와 그리스도께 대한 생각의 복종(고전 10:5)’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공격자들이 ‘믿음’을 ‘율법폐기주의(antinomianism)’ 혹은 ‘공허한 외침(without doing any work)’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모함이며, 오히려 그것(믿음)은 율법의 요구’에 유일하게 부응할 수 있는(롬 3:31; 9:30-31) ‘율법 존중’의 발로라 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이 ‘복종’ 개념이 기독교 영성을 다이나믹(dynamic)하게 만드는 요소이며, 오늘 종교다원주의자, 신비주의자들의 ‘정적(靜的)’, ‘명상적(冥想的) 영성’과 구분됩니다.

2) 하나님을 즐거워 함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인간의 두 번째 목적으로 제시하는데, ‘개혁주의 영성’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둘(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즐거워함)을 두부 자르듯 나누거나 차등을 두진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하나님 영광이 그의 목적이 되어있는 사람만 그를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둘 중 어느 것이 먼저라고 순서를 매길 수 없습니다.

보통 전자를 앞세우는데, 이는 단지 ‘논리적 순서’를 따른 것일 뿐 둘은 항상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1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두 내용을 함께 거론한 이유를 “후자 없이 전자만을 구하거나 전자 없이 후자만을 구할 수 없으며, 이 땅위의 집에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린 자들은 그를 가장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적절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은 그것의 강박적인 의무감 때문에 그의 모든 즐거움이 봉쇄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갈망은 ”칭의의 무거운 짐을 벗고 율법과 그 숨 막히는 요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John Calvin, Institute, Ⅲ,ⅩⅨ, 5)“에서 오는 은총의 결과이기에 그에게 즐거운 일이 됩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신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대로, 물질이나 소유의 유무(有無)와는 무관한 ‘구원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입니다(합 3;17).

풀어서 말하면, 믿음의 의(義)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알고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산 소망’으로 등극될 때 하나님이 그의 지고의 즐거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의 목적이 구현되고, ‘인간의 피조물 됨’이 더욱 공고해 지고 나아가 온갖 ‘탐심의 우상’에서도 건짐을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 이 글은 이경섭 목사가 쓴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2005년)’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저·역서는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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