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개혁주의 영성신학

1.개혁주의 영성의 목적

1) 하나님의 영광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기독교 영성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창조와(사 43:7, 롬 11:36) 구속의 목적(시 79:9, 엡 1:4-6) 모두에 부합합니다. 오늘 많은 경우 ‘영성수련’이 신비체험이 그 목적이 되거나 혹은, 자기 만족을 위한 크리스챤 유한족(有閑族)들의 고도의 정신적 유희(遊戱), 아니면 특별한 영적 파워(spiritual power)나 기능(skills)을 갖추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힌 개혁주의 신학이 그들의 신앙원리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 일문에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①하나님 영광의 현현으로서의 십자가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현시(顯示)되고 수납되는가? ‘모세의 시내산 체험(히 12:18-21)’과 ‘이사야의 성전 환상(사 6;1-5)’에서 묘사된 것처럼, 오직 ‘절대 주권자의 위엄’과, ‘율법적 공의 시행’을 통해서인가?(히 7:26)

만일 그의 영광이 다만 이런 엄위(嚴威)로만 일관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접근이 불허된, 초월적이고 두려운 유대교적인 야훼의 영광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현현됐지만 독생자의 대속에서보다 더 완전하게는 아닙니다. 그것은 ‘아담의 율법 준수’롤 통해 현현됐음직한 영광을 뛰어넘으며, ‘아담의 범죄’로 율법이 받았을법한 타격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구속 사역의 초보(初步)인 ‘독생자의 탄생(눅 2:14)’이 영광의 시발(始發)이었다면, 그것의 완성(요 19:30)인 ‘십자가 대속’은 영광의 극치였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부활’에 대해 비교우위적(比較優位的)’으로 높혀 말한 에릭 사우어(Erich Sauer, 1898-1959)의 말은 그것에 대한 최고의 칭송처럼 들립니다(그는 세대주의자이지만 이 점에선 귀 기우릴만 합니다)

“‘들린다’(uplift) 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타난 그 의미는 이중적이다(요3;14, 8:28, 빌2:9). 십자가에 ‘들림을’ 받게 된 것과 하늘 보좌에 ‘승귀’(昇貴)하게 된 일은 같은 일이며, 희랍어에도 한 말을 써서 그 두 사건을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가(the crucified One) 면류관을 쓰신 그이다(the crowned One)(빌 2;8-11, 히 2:9)… 십자가는 구원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서 부활보다도 더 위대하다. 십자가는 승리이며 부활은 정복이다. 승리가 정복보다 더 중요하다. 정복은 승리에서 필연적으로 온다. 부활은 승리를 공중 앞에 나타내 보이는 것, 십자가에 못 박힌자의 승리를 나타내는 일이다. 그런데 승리자체는 완전하다 ‘다 이루었다’(요 19:30)(The Triumph of The Crucified).“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현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죄인들이 그것을 수납하는 것을 통해 계속됩니다(요 6:28). 곧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도록 요구하고(단지 공포심만을 주는 ‘율법을 통한 죄의 자각’과는 차원이 다른) 죄에서의 구원과(고전 1:18갈 3:24) 하나님의 은혜를 송축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하의 형태’로 현시된, 하나님 영광의 다른 한 표현입니다.

흔히 ‘하나님 영광’ 신학에 몰입된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인간 구원’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 영광과는 거리가 있는 ‘인간 승귀(human Ascension) 행위’ 쯤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칼빈(John Calvin)이 말했듯, ‘하나님은 당신의 숭고한 인간 구원의 행위를 통해 무엇보다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비판은 적절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십자가의 영광(The Glory of The Cross)’은 루터(Martin Luther) 신학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십자가 신학’이 외적 논리로는 ‘영광의 신학’과 반대되는 것으로 표현됐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 영광의 한 형태였습니다(Paul Althaus, Die Theologie). 이는 그의 ‘나를 위하시는(pro me) 그리스도’에서 분명해집니다.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강조는 비판자들이 그의 신학을 주관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고 결정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비난은 좀 이상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루터의 표어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신 중심적인(God-centred) 방식이었고 그의 종교개혁의 돌파구의 반복 어구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엄숙한 강조였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권적인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의 핵심은 이 복음이 추상적으로 알려질 수 없고 오직 깊은 경험 속에 있는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Timothy George, Theology of reformers : 개혁자들의 신학).”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구원’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하신 방식 예컨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주로 고백해야 구원을 얻는 ‘구원 구조(the structure of salvation)’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식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 이 글은 이경섭 목사가 쓴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2005년)’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저·역서는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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