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오늘 한 페친의 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친구가 보낸 축의금 얘기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그는 사정을 알고 거금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도 고마워서 콧등이 시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2]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백만 원은 큰 힘이 되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아들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백만 원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축하해줘야 하는 기쁜 마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3] 그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도 그만한 액수를 축의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살기에도 빠듯한 현재의 어려운 형편 탓에 똑같은 액수의 축의금을 어떻게 마련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백만 원 축의금을 받아 힘든 살림에 보태 쓰면서 누렸던 행복과 고마움이 한순간 깊은 염려와 부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빚을 내서라도 그에게 백만 원의 축의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4] 사실 축의금이란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는 돈이기도 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도 있다. 결국 빚을 내서 마련한 백만 원을 가지고서 결혼식장에 갔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손님들 때문에 바쁜 틈이지만 안부까지 물어주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게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보다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이 되었는데 발신인은 며칠 전에 혼례를 치룬 그의 친구였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카드를 등기로 보냈나 하고 뜯어 봤더니 낯익은 친구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을 다 아는데 축의금이 다 뭐야?
그리고 어려운 자네 형편에 백만 원이 무슨 소리야?

[6] 만원이면 족하네.
여기 구십구만 원을 돌려보내니 그리 알게.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그 내용과 함께 구십구만 원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과 함께 친구가 보낸 구십구만 원짜리 수표를 받아든 내 페친의 글이다.

[7]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8] 날이 가면 갈수록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눈물겨운 일도 감동받는 일도 많았건만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이런 때에 오랜 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페친의 친구가 보인 친구를 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페친의 에피소드에 모처럼 크게 행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9] 오늘 내게는 이런 친구가 몇 있는지? 아니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지? 우리에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요 15:13) 말이다. 누구일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 친구는 없다.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주변 친구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늘 페친의 친구처럼 언제나 감동과 감격을 주며 사는 참 친구가 되어야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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