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둘째 날의 창조: 대기(‘라키아’, 궁창)

1) ‘라키아’(궁창)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의 하늘이 되다

허정윤 박사
허정윤 박사

둘째 날 창조 톨레도트를 보면, 모세에게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1:6)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이때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공중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아직도 깊은 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깊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믿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창조 서사시)에는 최초에 바다의 신과 호수의 신이 서로 물을 섞어서 자식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는 신들과 땅도 바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모세는 이집트 왕가에서 자랐으므로 이집트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BC. 624?-BC. 546?)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 1:2에서 첫날의 밤인 흑암의 시간에 깊은 물이 땅을 덮고 있었음을 서술한 것은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의 지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절은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있으라(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로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게 하는 ‘라키아’(궁창)가 만들어졌다. 물의 “나눠짐”은 물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라키아’를 깊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도구로 만드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1:7)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궁창을 ‘샤마임’(하늘)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했다(1:8). 둘째 날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에서 모세의 서술(1:7)과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칭하셨다는 서술(1:8)을 읽으면, 현대인들을 당혹감에 빠져버린다. 깊은 물 속에 있던 ‘라키아’가 어떻게 갑자기 하늘이 될 수 있는가?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의 깊은 물은 바다로, 하늘은 대기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키아’를 ‘샤마임’이라고 부르셨고, 모세는 ‘라키아’가 그 위의 ‘물을 담은 채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된 것’처럼 이해했다. 여기에서 현대인들과 모세 사이에는 엄청난 이해의 괴리가 있는 것이다. 이해의 괴리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도 있었다. 모세의 ‘샤마임’에 대한 이해는 단어의 의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샤마임’은 특이하게도 복수도 아니고 단수도 아닌 쌍수로 취급되는 명사이다. 히브리인들이 ‘샤마임’을 쌍수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위로 들어 올려진 ‘라키아’의 아래와 위를 ‘샤마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라키아’의 이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 톨레도트 전체 기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모세의 설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이해의 괴리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과 물을 나누는 물리적 기능을 ‘라키아’로 표현하셨지만, 고대 히브리인 모세에게 ‘라키아’는 청동 또는 구리 등의 금속을 ‘두드려 펴서 늘린 얇은 판 또는 거울’ 등의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깊은 물 전체를 아래와 위로 나누기 위한 도구로 ‘라키아’를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보면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말씀하신다. 모세의 서술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 칭하셨을 때, 모세는 그가 알고 있던 선지식(先知識)으로 하나님이 ‘라키아’를 그 위에 있던 물과 함께 들어올려서 하늘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이해의 괴리가 생겨난 것은 당시 히브리어에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물과 물을 나누라’는 명령 구절을 보면, 히브리어 ‘마베띨’(מַבְדִּיל)은 ‘바달’ 동사 앞에 ‘멤’(ם)을 붙여서 ‘비히’ 동사의 주어인 명사형 분사(나눠짐)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있다’는 뜻으로 쓰인 ‘יְהִי’와 ‘וִיהִי’ 두 개의 동사는 모두 미완료형 ‘칼’동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라키아가 있으라.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고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는 다만 물과 물 사이에서 나누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는 이유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물과 물 사이를 나누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 구성 분자 또는 원자의 최외곽 전자궤도가 만드는 전자껍질(Electron shell)로 해석할 수 있다(옥텟규칙 등에서는 전자궤도를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부르지만, ‘오비탈 이론’에서는 전자궤도를 함수로 설명하면서 ‘경계면’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좀더 일반적인 ‘전자껍질’이라는 말로 썼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현대적 의미에서 물을 원자 또는 분자 단위로 나누는 기능을 하는 전자껍질로 봉수 있다. 그렇게 나눠지는 물은 당시 모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의 기체이다. 물에서 원자들이나 분자들로 나눠진 기체들은 위로 올라가서 대기를 만든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그런 기체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샤마임’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식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는 ‘라키아’를 얇은 판으로 이해했고, 그것이 물을 담고 들어올려져서 물을 담은 하늘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은 물을 아래와 위로 나누고 있던 ‘라키아’가 위의 물을 그대로 담은 채로 들어 올려져서 하늘이 되었다는 모세의 이해는 노아 홍수 톨레도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세는 노아 홍수 때에 위에 있는 하늘의 물이 열려진 ‘하늘의 창’을 통해 쏟아져서 사십 주야 내리는 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창7:11-12). 모세가 이해한 ‘라키아’의 하늘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모세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설명했던 ‘라키아’가 지구 역사에서 존재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의 뜻을 오해함으로써 ‘샤마임’의 뜻까지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계속)

허정윤 박사(알파창조론연구소,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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