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담보
사채업자 두석(성동일)이 떼인 돈 받으러 갔다가 얼떨결에 9살 승이(박소이)를 담보로 맡게 된다는 영화 <담보> ©유튜브 채널 CJ Entertainment Official 예고편 영상 캡쳐
‘담보’란 채무자가 변제를 확약하기 위해 채권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보통 저당권과 같은 물적 담보가 이에 해당하지 사람을 담보로 잡는 일이란 현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 <담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공인 사채업자는 빚을 받으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채무자의 어린 딸을 담보로 데려옵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물리적 폭력은 없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납치를 한 셈이죠. 다음날까지 돈을 갚기로 한 채무자는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채무자(딸의 어머니)는 조선족으로서 불법체류자였고 하필 돈 갚기로 한 날에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 것이죠.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사채업자는 9살짜리 어린아이를 떠맡게 되고, 사실상 아이의 양육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후 영화는 어린아이와 사채업자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훈훈하게 그려냅니다.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엇갈립니다. 소위 ‘신파’의 방식을 답습한 채 관객에게 감동을 강요하는 진부한 영화라는 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따뜻한 영화라는 상반된 반응들이지요. 전자 편의 의견이 후자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갖추었음에도 이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영화가 보편적인 대중의 정서와 맞닿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악당의 개과천선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기대에 적절하게 부응합니다.

<담보>의 주인공은 악덕 사채업자로서 영화 초반부 거친 모습을 보이지만 담보물로 데려온 아이를 기르면서부터는 사실상 ‘따뜻한 아버지’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러한 식의 인물 묘사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중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파이란>(2001)에서 주인공 삼류 건달은 우악스러운 인생을 살아왔지만 중국에서 온 불법체류 여성과 위장결혼을 하게 되면서 순진무구한 그녀를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도모하게 됩니다.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2019) 또한 거대 폭력조직의 두목이 우연히 한 여성 변호사에게 일침을 당하면서 ‘좋은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고 마침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출마한다는, 전형적인 ‘악당의 갱생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류의 영화들은 몹쓸 짓을 일삼던 악한이 뜻하지 않게 선한 인물을 만난 후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게 되거나, 그의 순수함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그에게 감화를 받아 삶의 궤적을 바꾸게 된다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런 서사 구조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겉으로는 거칠지만 사실 속마음은 따뜻한, 소위 ‘츤데레’(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신조어)의 모습을 보이지요. <담보>의 사채업자는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기를 원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실례가 됩니다. 이렇듯 악당이 개과천선하는 이야기들은 관객에게 극적인 재미를 제공함은 물론 보편적인 관객의 정서에 부합한다는 특징을 갖는데, 이는 영화를 흥행하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그런데 <담보>에서 주인공의 개과천선은 그가 뜻하지 않게 이루게 된 ‘유사 가족’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채업자와 채무자의 딸이 이루는 일종의 부녀 관계는 비록 그 결말이 아무리 훈훈할지라도 정상의 범주에 드는 관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혈연관계는 고사하고 엄밀히 따져서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소위 유사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 주인공이 어린 여자아이를 맡아 키우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저 그런 사채업자로 사랑이나 희생과 같은 가치들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 가족의 서사는 주인공의 개과천선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유대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온기를 느끼며 영화에 대한 지지를 보내게 되지요.

이렇듯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이뤄내는 유사 가족의 이야기는 근래 들어 영화의 소재로 자주 이용됩니다. <굿바이 싱글>(2016)에서 두 여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은 한때 톱스타였지만 이제는 쇠락의 길에 접어든 연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청소년 미혼모입니다.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로지 각자의 이해관계로 맺어졌을 뿐이지만 점차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유사 모녀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나의 특별한 형제>(2018)는 제목이 말해주듯 친형제가 아닌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남자는 모두 장애인입니다. 한 사람은 지체장애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적장애인이지요. 이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조력자와도 함께 연대하며 ‘특별한 형제’가 되어 갑니다. 이 영화에서 유사 가족은 사회적 기준으로 약점을 지닌 이들이 함께 공감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연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렇듯 유사 가족의 서사가 근래 들어 많아진 이유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의심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꼭 피로 맺어져야 가족이냐’는 것이죠. 이는 가족을 이루는 것은 혈연이라는 끈만이 아니라는 새로운 가족관을 반영하는 것이자, 한편으로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해서 정말로 서로를 위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관계인지 진지하게 돌아보자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확대되고 있음을 영화의 영역에서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2018년도에 있었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중 칸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느 가족>과 베니스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로마>는 놀랍게도 모두 유사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이렇듯, 유사 가족이라는 개념은 인간들 사이에서 혈연관계에 못지않은 끈끈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치가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그것은 인생사에서 겪은 상처에 대한 공감이거나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공동의 목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도 유사 가족을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소위 멘토(Mentor)와 멘티(mentee)의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우선 혈통적 거리감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 때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이후 바울과 동행하면서 많은 중요한 일들을 바울을 대신하여 감당했습니다. 그뿐인가요. 바울이 기록한 여섯 권의 서신(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에서 바울과 공동 저자로 등장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바울이 급히 찾은 사람도 디모데였습니다(디모데후서 4:9). 그런 디모데를 가리켜 바울이 여러 차례 “아들”이라고 표현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17, 디모데전서 1:2, 디모데후서 1:2). 무엇이 혈연적으로 무관한 이 두 사람을 유사 부자 관계로 묶을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디모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빌립보서 2:20-22).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이들을 유사 가족의 관계로 만든 것이지요.

시선을 좀 더 과거로 돌려볼까요.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은 아둘람 굴에 은신합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윗의 친가족뿐만이 아니라 사울의 악정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윗을 따르고자 몰려듭니다(사무엘상 22:1-2). 그런데 자신도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으로서는 이들에게 좋은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들은 다윗과 함께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해 뛰어들게 했을까요? 다윗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채 점차 타락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세울 다윗과 그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가족의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선견했기에 다윗과 동고동락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도 유사 가족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심지어 유사 가족이 진정한 가족이 될 수도 있음을 천명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때 사람들을 가르치던 중이었고, 먼 길을 달려온 이들은 어정쩡하게 밖에 서 있게 되지요. 누군가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더라도 친가족을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형제의 범위가 육신의 형제를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가복음 3:31-35).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 가족이란 혈육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새롭고 참된 영적 공동체입니다. 혈연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로 무장되고 실천적 순종으로 맺어진 유사 가족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부합하는 주님의 새 가족이자 하늘에 속한 참된 가족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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