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옥한흠 목사
故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이미지 캡쳐

* 본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故 옥한흠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던 때도 오늘날과 같이 잔인한 세상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만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다는 구실을 내 걸고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을 도우지 않았다는 기록을 성경에서 많이 접한다. 예수님 시절 로마사회가 얼마나 비정하고 잔혹했는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다 염두 해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이렇게 외쳤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세상과는 정반대로 교훈하시는 것만 같다.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표독스러운 행동을 해야 사람대접을 받는데, 주님은 반대로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왜 긍휼히 여겨야 하는지 깊이 깨닫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기름 부어 주셔서 이 세상을 살맛나도록 긍휼을 베풀 수 있길 바란다.

긍휼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성경에서 긍휼이란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을 대할 때 보여주시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이 말은 성경 내용의 의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의 태도가 긍휼인가.

동일시라는 말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의 처지에서 같이 행동하고 도와주는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표현한 가장 적절한 마음이다.

하나님만큼 우리를 완벽히 긍휼하게 여기시는 분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빌립보서 7~8장을 보면 자신을 비웠다.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면 내려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하셨고, 히브리서 2장 17~18절에 보면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본인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비웠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시험을 몸소 체험하셨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현대말로 동일시하기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만큼 하나님의 긍휼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 그리고 명령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쉽지 않다. 형제 사이에도 한번은 해 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 나의 것을 나누며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느냐가 물을 때 쉽지 않다. 요즘같이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며 매정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얼굴을 돌리는 때 주님의 긍휼을 실천할 수 있는가. 못할 줄을 알면서 우리에게 주님을 명령을 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되지도 않은 명령이 아니다. 내가 실제로 받은 것이 있으면 가능하다.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라면 못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는 경험을 했는가. 그렇다. 경험을 했다. 언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나 같은 죄인 불러서 무조건 값없이 죄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서 이제부터 내 아들이라, 아버지라고 부르면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긍휼을 부어 주셨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말은 긍휼히 흘러넘칠 정도로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마음에 긍휼함이 쏟아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를 수 있는 샘물이 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나. 로마서 9장 15~16절에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겼다고 하신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순전히 좋다고 여겨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이다. 그 뿐인가. 구원받고 나서 이제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다. 주의 긍휼하심 없이는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받으며 오늘을 살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긍휼함을 받았기에 우리도 남을 긍휼을 여길 수 있다. 이 긍휼의 힘을 가지고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첫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겼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을 보실 때, 귀족이든 천민이든지 심히 긍휼히 여겼는데 목자 없으면 뿔뿔이 흩어지는 양과 같이 여겼다. 이 세상에서 남보다 출세하고 남보다 건강해서 오래 산다고 해서 무엇이 좋은가. 결국은 내가 구원 받는가. 못 받는가가 운명을 결정하는 입장에 놓이는데, 그 영혼이 영원히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그 얼마나 불쌍한가.

119 운동을 한다.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하자라는 캠페인이다. 우리 모두가 해야 될 일이지만,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긍휼을 내 마음에 가지고 주님을 모르는 자를 볼 때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영원히 떠날 시체를 놓고 통곡을 한다면, 하나님이 떠난 영혼을 놓고 어찌 우리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둘째, 주님은 고통 중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셨다. 주님은 병든 자, 장애인, 천대 받는 죄인들과 귀신 들린 자를 불쌍히 여겼다. 성경 속 이야기 중 어느 나병환자가 목숨을 걸고 주님 앞에 나왔다. 그는 “선생님이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고 치유하셨다. 우리도 눈 높이를 조금 낮추어 주변을 보면 긍휼을 원하는 자가 많다. 차가운 눈을 가지고 살지 말라. 우리 주변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돌과 같이 굳어 있는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변을 긍휼히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길 원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를 통해서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전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쉽게 말해서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긍휼함이 깔려 있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행복을 약속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행복한 이유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평안하고, 이기심과 갈등으로 풍랑이 일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한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긍휼히 여기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다.

또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조건 없이 긍휼을 입었다. 구원 받은 이후에 긍휼을 입으려면 이것은 조건적이다. 꼭 기억하라. 너희가 용서하면 내가 용서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먼저 도와주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얼굴을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그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날마다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는데 세상이 겁낼 것이 무엇인가. 형통할 때나, 역경을 당할 때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긍휼히 여기라.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원하는가. 먼저 긍휼을 여겨라. 그래서 잔혹하고 악하고 매정한 세상, 우리가 들어가서 긍휼을 베풂으로 이 사회를 치유하고, 절망에 빠진 많은 자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치유하고, 이 세상을 살만 나는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 누가 하겠는가. 우리가, 예수의 제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우리 모두가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도록 해주시기를 바라고, 긍휼이 여김으로 복 받는 자가 되길 바라고, 긍휼이 여김으로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놀라운 주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옥한흠목사 #옥한흠 #산상수훈 #마태복음 #긍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