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십년 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인 큰 아들 아이와 차를 타고 오면서 평균 이상의 샤워시간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어지는 문제로 엄마로서 이런저런 훈계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 즈음엔 큰 아이와 대화를 시작하면 그전 같지 않게 결론이 부모도 아이들처럼 완전치 않다는 선에서 협상 정도로 마무리 되곤 하기가 일수였는데, 그날 대화 중 새어 나온 아이의 볼멘 듯한 한탄이 유별나게 인상깊은 여운으로 오래 남았었다.

“전 미스터 아담에게 정말 유감이 많아요… 아담이 선악과 대신 생명나무를 먹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고등학생인 아들애가 마치 인류의 조상 아담을 제 친 할아버지로 생각하듯 살갑게 원망하는 투도 투려니와 내용 또한 생각할수록 너무도 잘 아는 것이지만 역시 너무도 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늘 인류 최초 조상의 범죄를 먼 옛날 이야기인 것처럼만 여기고 설교 예화용으로 주로 열을 내고 사용한 적은 있어도, 언제 한번이라도 실감나게 그들이 저지른 죄와 유전되는 죄성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사무치도록 가슴 아파한 적이 있었던가? 내심 몰래 반성이 되면서 며칠 동안 두고 두고 은근히 속이 묵직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善惡果)를 먹지 말라고 오직 명령을 하셨던 것이다!

최초의 인류에게 주어진 선(善)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오직 순종함으로만 얻어질 수 있었던 것인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원칙(spiritual principle)보다는 보이고 끌리고 만져지는 실체에 씌워진 선악이라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달콤한 환상에 온통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이런 인간의 속성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보이고 만져지는 지식인 과학적인 이성체계로 초과학적이고 초이성적인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현상으로 제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믿음 없이 계속 성경을 학술적 검토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양식비평이니 편집비평이니 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해치는 작업을 무슨 대단한 특권인 것처럼 여기는 모습들이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

생명나무에는 영생의 열매가 열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엔 죄와 죽음으로 안내되는 자기 의(義)의 교만의 열매가 열리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이미 주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관통하고 생명나무의 영생수로 솟아나는 말씀보다는, 그럴싸하게 우리의 오감(五感)에 호소하고 이성적 판단에 어필되도록 단장한 선악과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영적 에덴에 사는 우리들이라면 세상을 달리는 중에도 우리의 눈을 길들여 우리의 시선이 어느때고 생명나무를 무시로 바라보도록 연습되어야 한다. 선악과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서 생명나무를 바라보는 일에는 영혼의 수고와 고통, 아픔이 따른다. 생명나무의 본체는 영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상함받게 하시길 원하셔서 질고를 당케 하셨다. 그의 영혼을 죄 사함의 제물로 드리게 하셨고 범죄자를 위해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다. 이 같은 영혼의 수고(suffering of his soul)를 온통 감당케 하셨다.

그 결과 예수께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을 느끼는 선물을 받게 되셨다. 이것이 예수의 지식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자신을 기쁘게 내어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지식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지식으로써 예수님은 많은 이들을 구원하셨다(사53:10-12).

이는 또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from God)라고 성경은 말씀한다(롬3:21-26).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랑의 의’ -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식이요, 세상의 지식을 먹은 후예들을 구원키 위해 내 놓으신 생명나무의 지식인 것이다.

어느 때고 우리 모두는 이 하늘의 지식의 나무 즉 생명나무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예수처럼 우리도 상함 받게 하시길 원하실지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께 마저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의 고난을 통하지 않는 다른 뾰족한 방도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 고난의 댓가로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특권을 부여 받은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주님이 걸으셨던 길과 같은 영적인 여정(spiritual path)이 필연적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게 된다.

그러나 명심하자. 우리의 고난(suffering)은 예수님이 당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매우 매우 작은 것이라는 것을….. 이미 주님께선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다 치루셨기에 주님의 가벼운 짐과 쉬운 멍에를 매는 우리로선 다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의 영예를 누리는 것 뿐이라는 것을.....

부활 신앙은 죽음의 신앙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도록 매일 수고를 감당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는 일 – 이로써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룰수 있고, 생명의 빛을 볼수 있고,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주어지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삶 속에 부활신앙이 사철 만발하면 이 부활의 꽃 향기 속에 진정한 믿음과 예배와 회복과 성장과 부흥과 희망이 열매 맺어지리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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