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1 그 다음 해 봄에,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맡겨서 출전시켰다. 그들은 암몬 사람을 무찌르고, 랍바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2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11장의 배경은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군대와 장군을 전선에 내어보내고 혼자 남아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 '그 해가 돌아와' 라는 것은 유대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아빕월)이 돌아왔다는 것이고, 태양력으로는 3월이나 4월 즉 새 봄이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에 적합한 시기가 아닙니다. 반면에 봄은 건기(乾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에 적합한 시기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봄' 즉 전쟁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왔다는 것을 재차 강조해서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다윗은 요압 장군과 그의 종들을 보내서 암몬족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긴박한 순간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삼하11:1) 이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배경이면서 이 장의 서두입니다. 사실 이것은 전혀 다윗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전선(戰線)에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지금 온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성을 에워싸고 있는 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예루살렘 왕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가 안정되어 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2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 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았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성경은 다윗이 잠을 자고 일어난 시기가 저녁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낮잠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한 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풍습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전쟁터에 나갔는데 다윗이 낮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영적 긴장이 풀려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잠자다가 죽은 사람을 여러 명 보여줍니다.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다가 졸지에 머리 베임을 당했습니다.(삼하4:5) 드보라에게 쫓기던 장군 시스라도 잠을 자다가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맞아 죽습니다.(삿4:21) 의자에 앉아 졸던 엘리 제사장은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삼상4:18)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잤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서는 안 될 상황에서 잠들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전쟁중에 언약궤가 출두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함께 먹고 마신다는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상징이고, 함께 먹고 마심은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공동체는 전투중인데 다윗은 후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낮잠을 잘 때가 아니라 전방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조바심해야 할 때입니다. 저녁 무렵 침대에서 일어나 옥상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윗 궁은 높은 시온산에 있었기 때문에 인근 주민의 집 안마당을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지붕 위를 걸을 때 목욕하는 한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안 마당에서 목욕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럴 경우 이웃집을 내려다보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목욕하는 한 여인에게 그만 시선이 멈춰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그 때 다윗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삼하11:2)

저녁이란 말의 상징은 하나님도 선선한 때 동산을 거닐고 있을 때 아담과 하와를 만났고, 다윗도 밧새바를 선선한 때 지붕위를 걷고 있을 때 만납니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충직한 신하 우리아를 죽입니다. 요압과 협력하여 죽입니다. 나중에 요압이 오만방자해진 이유도 이런 절대왕정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는 유난히 보냈다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 보게 하였다.(3)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4) 요압에게 전갈을 보내서(6)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편에 보냈다.(14) '보냈다'는 말은 그의 권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권력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고, 돈도 있었고,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이들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자신을 잘 살피지 않으면, 자신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그 여유있는 힘으로 자신을 망하게 합니다. 능력이 많을수록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영적능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다윗의 간통뿐만 아니라 그가 간통한 여인의 남편을 청부 살해하는 장면까지 전혀 감춰주거나 두둔해 주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후로 보는 것이, 그로 인한 다윗의 파멸이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통절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감추어져 있는 그늘과 용기 있게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면을 정돈하여 내 안에 다시 하나님께서 계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변화에 대하여 서신서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15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엡3:14-19

여기 바울의 첫째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강해지고,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서 거주하기를 기도한다.(16-17)

수시자들의 내적 강화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리도인들의 내적 본질이 강건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재기도를 필요로 할 만큼 수신인들의 신앙이 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몸과 영혼을 구별해서 외적인간과 내적인간으로 말하는 헬라철학에서 온 것입니다. 고후 4:16에서 "속사람"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새로워진 사람으로, 소멸과 죽음에 던져진 "겉사람"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사람은 단순한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능, 욕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16절의 속사람은 17절의 마음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속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성령의 활동자리가 "속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엡 4:24에 나오는 "새사람"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은혜로 세례를 받고 중생한 인간이고, "속사람"은 새사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강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이해할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18-19상반절)

하나의 관사에 네 개의 개념이 연결되어있는데, 그 의미가 문맥 안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 그 도성은 네 모가 반듯하여, 가로와 세로가 같았습니다. 그가 자막대기로 그 도성을 재어 보니,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서로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계21:16)라는 기록 있을 뿐입니다. 유대교 문헌 시락서 1:3에는 "하늘의 높이", "땅의 넓이", "바다의 깊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네 개의 개념고리는 18절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무엇이 우주의 중심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셋째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한다(19 하반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 표현은 아주특이해서 16절로 시작한 기도의 내용은 점차적으로 단계가 높아갑니다. 1)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2)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마음에 거하시며, 3) 그리스도의 사람을 알게 되고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게 된다. 하나님의 충만은 하나님의 본질의 완전성과 전체성으로서 교회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복음서의 말씀은 디베랴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죄인은 사회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용어입니다. 죄인은 사회-경제적 가치와 질서에 의해서 배출되었습니다. 죄인이라는 규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스스로 뗄 수 없는 굴레였습니다. 죄인은 종교적으로도,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죄인과 식사자리에 앚지 않은 것은 단지 개인 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규정이 당시 유대사회의 사회- 종교적인 체제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개방식사는 죄의 개념을 만들어낸 그 사회체제와 제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의 개방식사에 분노한 이유는 단지 죄인들과 밥을 먹은 예수를 비난 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배척된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공개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고 유지해온 그 사회의 가치를 파괴한 것입니다. 기존질 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질서를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신학적 의미에서 개방식사는 용서와 화해의 사건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정결치 못한 자였고, 저주받은 자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와 마주하며 식탁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였다는 "화해의 선언"입니다. 개방식사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결정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개방식사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 개방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도, 종교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도, 여자도 아이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신분, 남녀의 성별, 종교적 차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당시 구원은 엄격하게 유대주의의 범위 안에서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개방 식사는 유대주의가 정한 정결예식, 율법의 조한, 죄인에 대한 규정을 넘어섰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 이야기가 예수의 기적을 행하셔서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것에서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통한 개방식사가 있은 후, 다음날 무리들은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들 무리와 대면한 예수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 그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 ( 25-26 )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양식임을 말씀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35)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51)

예수는 자신을 " 내가 생명의 빵이다. "(6:35)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디베랴에서 먹은 빵은 먹고 나면 다시 배고플 빵입니다. 영원히 주리지 않는 삶을 살려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영적 태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매일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과의 연결의 중을 팽팽하게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저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삶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7월 29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다윗 #밧세바 #박만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