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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오늘의 설교 제목 "성령의 날인"이라는 표현은 '새번역'(2004) 에베소서 1장 13절에 나오는 "성령의 날인"에서 따온 것입니다. "누를 날(捺)" 혹은 "찍을 날(捺)" 자에 도장 "인(印)" 자가 합해져서 형성된 낱말 "날인(捺印)"은 도장을 찍는 행위, 혹은 그 결과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여기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만 나옵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낙인(烙印)"이란 낱말도 있습니다. "지질 낙(烙)" 자에 "도장 인"이 합쳐져서 형성된 말입니다. 명사 낙인 (烙印)은 "불에 달구어 찍는 쇠도장" 곧 "화인(火印)"을 일컫기도 하고, "씻기 어려운 불명예(不名譽)스러운 판정이나 평가"를 일컫기도 합니다. 날인과 낙인은 둘 다 도장을 찍는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뜻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새번역'에 "(성령의) 날인을 받다"라고 번역된 것이 '구역'(1911)이나 '개역'(1938, 1961)이나 '개정'(1998)에서는 "(성령으로) 인(印) 침을 받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성령의 도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낙인"이 형벌이나 불명예에 관련된 말인데 반해, "인(印)침"은 인정과 명예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은 친다는 이 말은 본래 귀중한 문서에 작성자가 확인 도장을 찍는 행위나, 귀중한 기록물이 들어 있는 봉투를 밀봉한 다음에 수신자 이외에는 아무도 열어보지 못하도록 밀봉한 부분에 인장반지"인을 친 밀랍"을 붙이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의 "성령의 날인" "성령의 인 치심"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고 은유(隱喩)입니다. 문맥을 보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 곧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모실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우리에게 "성령" 도장을 찍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날인" "성령의 인 침"이 무슨 뜻일까요?

먼저 오늘의 성서일과 중 에베소서 1장 3-14절의 진술 내용과 전체 문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부터 14절까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본래 3절부터 14절까지 12개절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번역들은 이 긴 한 문장을 여러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은 14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합니다. 그리고 3-14절은 그 내용이 아주 뚜렷하게 세 부분으로 나뉘고, 매 부분마다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진술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자"(엡 1:3a)고 권면합니다. 찬양해야 할 이유를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합니다(엡 1:3b). 이 초청에 이어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까닭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상기시킵니다.

첫 부분 4-6절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신 분이 바로 성부(聖父) 하나님이심을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 7-12절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자(聖子) 그리스도를 우리의 희망으로 모시고 살도록 이끄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셋째 부분 13-14절에서는, 성령(聖靈)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때가지" "우리가 받을 상속(相續)의 담보(擔保)가 되어주신다는 것, 우리가 받을 상속을 성령께서 보증(保證)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4절의 진술 속에 있는 "창조 이전"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낯섭니다. 그러나 잠언 8장에서도 우리는 창조 이전에 관한 진술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화(擬人化)된 지혜(智慧 호크마)가 창조 이전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22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23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24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주님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創造)의 명공(名工)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31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 8:22-26, 30-31)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영원 전에, 아득한 그 옛날에, 땅도 생기기 전에, 지혜가 먼저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데리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지혜에게 어떤 임무를 부여하시려고 지혜를 이미 지명하여 부르셨고, 실제로 지혜로 하여금 이 세상을 창조하게 하셨듯이(지혜가 하나님 곁에서 창조자 구실을 했다는 진술을 개역 잠8:3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벌써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에베소서 저자는 진술합니다(엡 1:4).

이어서 5절에서 에베소서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셨다고 진술합니다. 이것도 이미 창조 전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곧 신자가 상속권을 가진 입양된 자녀, 하나님의 가족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6절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낱말과 표현이 부족해서 하나님과 아드님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에가페메노) 아들"이라고 밖에 더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리스어 '에가페메노'는 그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특수 친밀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사랑하시는 아드님" ("only beloved", "His dearly loved S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NET).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는 문자대로는 "그의 은혜의 영광"입니다.

7절은, 우리 성도들이 이 아드님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아드님의 피로 구속(救贖) 곧 죄 용서(容恕)를 받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는 문자대로는 "그분 안에서"이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일수도 있고 아드님일 수도 있습니다. 번역에 따라서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KJV)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8-9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神秘)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여기 "신비"는 그리스어 '미스테리온'의 번역입니다. 미리 나타나지 않았던 신성한 비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알려주셨다"는 것은 "계시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10절은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統一)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統一)시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어 '아나케팔라이오사타이'를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NET 해설 엡 1:10)

첫째, "통합된다"(sum up, unite)는 뜻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3장 9절에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금지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더라도 모든 계명은 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이 한 마디 말씀으로 통합된다고 할 때 사용되는 "통합"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아나케팔라이오사타이'를 이렇게 이해하는 견해에서는 에베소서 1장 10절을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합 될 것이다"(ASV, ERV, ESV).

둘째, "새로워진다"(renew, renovate, reestablish)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하늘에서 땅에서 죄와 파괴의 상태에 있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상태가 새롭게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아나케팔라이오사타이'를 이렇게 이해하는 견해에서는 에베소서 1장 10절을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될 것이다."(ETH: Etheridge Translation of the NT Peshitta, 1849)

셋째, "우두머리가 되신다"(head up)는 뜻이라고 합니다. 때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교회를 포함하여) 위에 "머리"로 군림(君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번역'과 같은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새번역', 1993/2004 엡 1:10)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삼자, 세례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고,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었고, 헤로디아는 헤로디아 대로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일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딸과 모의하여 요한을 참수하게 합니다(막 6:17-29). 그러나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면,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면,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우두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이 되면, 세례요한의 죽음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바알라의 아미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궤(법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예병 3만 명이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윗 왕은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백성의 마음이 다윗 성으로 향하게 하려던 계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창한 행사를 하면서 궤를 옮기던 도중에 궤를 운반하던 소들이 뛰는 바람에 궤가 흔들렸고, 웃사는 그 궤를 꼭 붙들고 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현장에서 죽고 맙니다. 다윗의 불순한 의도를 벌하신 걸까요?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궤는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기도록 조치합니다. 석달 동안 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윗 왕에게, 궤를 집에 보간한 오벳에돔이 복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그 궤를 다윗 성으로 운반합니다. 다윗은 큰 잔치를 베풀고 백성은 환호하고, 다윗은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이 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갔습니다.

20 다윗이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궁전으로 돌아가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21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22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23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삼하 6:20-23)

그러나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면,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면,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우두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이 되면, 권력가의 종교 이용과 왕가의 세력 다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곧 "상속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가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속에서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12절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은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聖靈)의 날인(捺印)을 받았다"고 합니다. 설교의 처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우리의 어디에 성령의 날인이 있습니까? 우리 몸에 그 날인이 있습니까? 몸에 있다면 몸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입은 어떤 외상에, 상처에 성령의 날인이 있습니까? 절뚝거리는 야곱은 부러진 환도 뼈 같은 것이 어쩌면 날인의 표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마음에 성령의 날인이 있습니까? 너무 막연하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 서두에서 우리는 "은유"라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기독교의 기원과 전통과 성경을 배우고, 구원의 메시지를 듣고, 그 진리를 깨닫고, 믿고, 그리고 자유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자유를 체험하였습니다, 전하고 싶습니다, 실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국민으로 부름 받은 것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디쯤에 "성령의 날인"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그 날인인가요?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서명(署名)하시고(signed), 봉인(封印)하신(sealed) 그 도장(圖章, signet)을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장"(계 7:2; 9:4)이라는 말이나 "하나님께서 찍어주신 그 도장"은 이미 "은유"입니다. 은유법은 비유법 중의 하나입니다. 사물의 본뜻은 숨기고 표현하려는 대상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이는 나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꽃송이라오"(아 1:14). 남자가 자기 여자를 두고사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은유입니다. 여자도 응답합니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아 1:15).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는 은유가 아니고 직유입니다. "...가 ... 같다" 이것은 직유입니다.

최근에 모 정당 권한대행이, 자체 정당의 문제를 심한 중증외상(重症外傷)으로 진단하고, 모 대학병원 중증외상센터장에게 가서 자기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줄 것을 제안 했으나 그 의사가 그 제안을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권한대행이 비유적 암시를 역사적 사실로 착각한 것은 아닐 거고.... 저에게는 그 권한 대행이 자기 당이 당면한 사태의 심각성을 행위비유(行爲比喩) 혹은 행위은유(行爲隱喩)로 연출한 기가 막힌 행위예언(行爲豫言)으로 보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으랴가 아니라, 자기 당이 당한 처지의 심각성을 온 국민에게 깊게 각인시키려는 의사 전달 행위로 보입니다.

우주선(宇宙船)을 타고 "하늘 영역" 혹은 "하늘 세계"로 가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있을 수 있을까요? 극단적 문자주의(literalism)에서는 가능한 일일 것이지만, 일반적 상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새번역' 아 8:6)

아가의 여주인공이 자기 남자 친구에게 하는 말입니다. "성령의 날인"이라는 표현이 언어에 따라서는 난해한 은유일 수는 있어도 "사랑의 날인"이라고 하면 아가에서 보듯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14절입니다. "이 성령(聖靈)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完全)히 구원(救援)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相續)의 담보(擔保)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라고 한 것을 보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상속자입니다. 14절은 성령이 "우리의 상속의 담보"라고 합니다. 1) 성령은 보증(保證)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상속으로) 받는다>는 보증입니다. 2) 성령은 담보(擔保)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신다.>는 것에 대한 담보입니다. 성령이 바로 담보입니다. 담보란 채무 불이행 때 채무의 변제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미리 채권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적 담보와 인적 담보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성령의 날인" 그 흔적이 내 몸 어디에 있는지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사랑의 날인의 흔적을 몸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몸과 마음에도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성령"을 받으시는 것과 "사랑"을 받으시는 것의 경험의 유사성에 착안할 때 성령 체험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도장 새기듯,
하나님의 마음에 저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하나님의 팔에 저를 새기세요.
그래! 그러지!
도장(圖章) 새기듯,
내 마음에 너를 새기마.
도장 새기듯,
내 팔에 너를 새기마.
하나님, 저두요!
도장(圖章) 새기듯,
제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겠습니다
도장 새기듯,
제 팔에 하나님을 새기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갈 수 있으면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겁니다. 우리는 바로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도장"입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7월 15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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