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령중앙협의회 제29대 대표회장 이수형목사
세계성령중앙협의회 제29대 대표회장 이수형 목사 ©세성협 제공

[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한국교회는 1907년 길선주의 회개로 한국교회 정체성을 세웠다. 2017년은 종교개혁500주년이며 사단법인 세계성령중앙협의회 창립 28주년이다.

사단법인 세계성령중앙협의회(대표회장 이수형 목사)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원장 안준배 목사)은 지난 2008년부터 9년간 한국기독교성령100년인물사를 간행하였다. 목회자 57인, 한인목회자 5인, 부흥사 25인, 신학자 21인, 교육자 11인, 선교사 24인, 독립운동가 14인, 순교자 4인, 사회봉사자 18인, 교계연합 7인 등 각 분야에서 성령과 동사한 197인의 삶을 한국교회사에 헌정하며 앞서 발간된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 1~3권에 이어 4권을 오는 3월 20일 출판한다. 아울러 '성령백년 성령197인 헌정식 및 세미나'를 2017년 3월 23일(목) 오전 7시 서울 여의도 CCMM 컨벤션홀에서 갖는다.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 간행에 명예편찬위원장 민경배박사는 "본서의 간행은 그분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교회 실상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이루어 놓았던 한국교회의 그 거대한 역사적 책임과 사명을 더욱 정확하게 알고 확대하고 빛내서 향후 한국교회의 세계사적 사명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결의를 굳히는 것이 그 목적이다"라고 편찬사를 전했다.

명예편찬위원장 이영훈목사는 "신앙의 선배들이 지금까지 성령운동을 통해 이 땅의 부흥의 역사를 이끌어 왔듯이 미래의 한국 기독교 역시 계속해서 성령운동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해서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사명을 감당하신 분들을 기념하는 동시에, 성령의 사람들을 본받아 새로운 성령운동을 꿈꾸는 사역자들이 계속해서 세워지기를 기대한다"고 편찬사를 전했다.

편찬위원장 소강석목사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개혁되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신성장의 동력이 필요하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다시 임해야 한국교회가 개혁되고 부흥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가 한국교회 안에 다시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발간사를 전했다.

상임편찬위원 안준배목사는 "한국교회는 정직과 청렴과 고결의 토대 위에 다시 세워져야 한다. 이에 한국기독교 성령백년인물사에 수록된 197명의 성령행전을 한국교회사에 상재한다."고 편집사를 전했다.

헌정식에서는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에 수록된 역사인물과 현존인물 197명을 헌정하고 참석한 현존인물과 역사인물 직계후손에게 헌정서를 전달한다. 헌정위원장 이영훈목사가 헌정사를 맡았고, 세계성령중앙협의회 대표회장 이수형목사가 개회사,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 원장 안준배목사가 헌정인도, 소프라노 오미선교수가 헌정가, 성산교회 오범열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세미나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세운 독립운동가, 교육자'라는 주제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민경배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박명수박사가 강사로 나선다.

민경배박사는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 4권 독립운동 편에 수록된 이원근, 김마리아, 윤하영을 중심으로 한 세미나에서 다음의 내용으로 강연한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 기독교로 말미암아 양출(釀出)되었다고 하는 것은 묘하게도 한국을 침탈한 식민주의자가 천황(天皇) 현인신론(現人神論)과 신사(神社)제도의 일본이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일본에서의 천황제 위치가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와 같다는 말이 된다. 일제하에서 식민지로 살아온 한국이 그 기독교로 민족 동력의 기축이 되어 있었고 일제의 헌법상 기축이 천황제였다고 한다면 양국 간의 갈등과 대결은 불가피하였다는 말이 된다. 일제 치하 그 헌법 아래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생존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초헌법적 사성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원근 장로는 세계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이영훈 목사의 조부이시다. 그는 애국지사 신앙지사로 알려져 있다. 이원근 장로는 그 가문이 신앙으로 빛나게 한 이재식의 아들인데, 이재식은 정조대황의 4남 신성군의 16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이원근 장로는 한국교회 신앙의 정통(正統) 계보(系譜)에 서 있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한 것은 그는 한국교회 복음적 신앙의 산실인 서북지방 평양 신양리 출신이요, 더구나 한국교회의 요람인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거주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에 와서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에 다녀, 묘하게도 한국교회 신앙의 원천(源泉) 곧 평양(平壤), 장연(長淵), 여의도순복음교회, 이 세 곳을 묶는 한국교회 정상(正像)의 핵심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독실한 한국교회의 알짜 신앙의 핵심 레가씨(Legacy)이다.

한데 그는 2016년 3월 1일 세종회관에서의 3.1절 제 97주연 기념식 석상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으로 6개월간의 형고(刑苦)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독실한 원형적 신앙과 독립운동, 여기 이원근 장로의 한국교회사상(史上)의 한 필연적 구도가 현상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제치하 독실하고 경건한 신앙은 독립운동과 자연히 연계(連繫)되도록 되어 있었는가. 그것은 이미 우리가 제1장 서두에서 분명히 분석하고 지나왔다. 일제하에서는 그 제국헌법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한, 기독교는 그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반국체(反國體) 반천황(反天皇)의 역학관계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번 간행되는 『한국성령백년 인물사』에서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일제의 신사참배와 한일합방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다/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애국자였다>란 글에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이원근장로는 3.1운동 당시 황해도 장연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고 만주로 탈출하다기 관헌에 붙잡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며 잔학을 극한 고문에 시달렸다.

한데 한라지 흥미로운 사실은 해방 후 이원근장로는 평양에서 재봉무역상을 하여 크게 공하고 있었는데, 그 상점에서 회계와 물품 출납을 담당하던 사람이 바로 강양욱(康良煜)이란 사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2인자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다. 이원근과 강양욱은 평양 서문밖교에 같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康盤石)의 부친 강돈욱(康敦煜)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강양욱의 아들이 후에 조선그리도교도연맹의 위원장 강영섭(康永燮)이었다.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강양욱과 이원근! 그 둘이 그렇게 함께 일하고 함께 교회에 나가고 그래서 막역한 친구였는데 하나는 북한 서열 제2위의 공산주의자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세계적인 최대의 교회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목사 이영훈의 조부가 된다.

여기까지 와서 이원근 장로의 위상이 기막히게 전형적인 <한국적>이란 생각이 굳혀진다. 평양, 장연, 강양욱, 이영훈, 이 4가지를 묶으면 거기 한국교회의 역사적 실상(實相) 그 거점(據點)이 절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여기 한국 통일된 미래상이 떠오르지 아니하는가. <이원근> 그 본상과 역학으로 한국 그 전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김마리아는 역시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한 원상(原像)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곧 신앙과 민족 그런 것이 유기적 관계를 가지는 한국교회 구조적 신앙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요람지(搖籃地)라고 할 수 있는 황해도 장연(長淵)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 곧 솔내 출신이다. 거기는 서상륜(徐相崙) 서경조(徐景祚)의 고향이요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던 곳이다. 더구나 그의 집안 가계는 한국 근재화의 원점이라는 인상이 들 정도로 기라성 같다. 김필례(金弼禮)가 그의 고모요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徐丙浩)가 고모부(姑母夫), 그러니까 서경조가 그의 외조부인 셈이다. 김규식(金奎植)이 그의 고모부, 남궁혁(南宮爀)이 그의 형부(兄夫)이다. 대단한 가문이다.

한데 김마리아는 오늘의 표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학력 스펙을 가졌다. 곧 이화(梨花), 정신(貞信),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여학교, 도쿄(東京)여자학원, 중국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 미국의 Park College,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 뉴욕신학교(New York Bible Seminary), 이런 여러 유명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 교사, 서울 정신여학교, 원산(元山) 마르다 윌손여자신학원 등에소 교편을 잦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그 가문의 독실한 신앙과 이런 근대교육의 자연스런 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숙부인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투사였다. 그 밖에도 김윤오, 서병호, 김구례 김규식 김순애 김필례, 이들 가족 전부가 열렬한 애국투사들이었다.

그가 처음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1917년 동경에서 한국여자유학생친목회장을 맡을 때부터의 일이다. 그는 1919년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곧 귀국하여 한국에서의 3.1운동을 일으키다가 일경(日警)에 채포되어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되자 곧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그 회장 일을 맡아 군자금 모집에 헌신하였다. 고문에 몸이 상하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거듭하다가 1921년 중국 상해로 ᄆᆞ명길을 떠나 임정요인들과 만나고, 그리고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미국유학 길을 마치고 1932년 40세 되던 해에 귀국, 원산마르다여지신학원 교수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34년에는 장로교총회여전도회 회장을 맡아 신사참배운동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다신학원이 1943년에 폐교되고 김마리아는 얼마 후 졸도하여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하였다가 1944.3.13.에 소천(召天)하였다. 1962.3.1.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았다. 김마리아는 한국에서의 여자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김마리아의 경우는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이 기독교의 정통성과 기독교의 근대화 추진동력과 필연적으로 연계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윤하영(尹河英)목사는 서북의 선천(宣川) 주재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램프(H. W. Lampe)의 후원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램프선교사의 후원으로 196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은 물론 국제정세에도 뜨거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미국 호주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맡고 있었는데, 조직신학(組織神學)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교회사(敎會史)는 호주선교사들, 실천신학은 캐나다선교사들, 어학(語學)은 남장로교 선교사들, 이렇게 각각 영역별 분담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국제적인 교수구성이 학생들에게 글로벌 의식을 환발(渙發)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정확하게는 1910~1945년까지의 일제 한국 식민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위한 투쟁을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눈에 띈다. 곧 한국 근대화의 동력이 기독교에서 가동(稼動)된 사실을 생각한다면 근대화를 통한 시민사회 형성이라든가 민족의식의 고취(鼓吹), 이런 것들이 독립운동의 역량 출력(出力)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의 선교로 성서적 진리에 의한 새로운 세계관의 계발(啓發)로 한국의 엘리트층이 기독교인으로 형성되면서 일제헌법의 천황제-기축(機軸)에 정면 저촉되어 한국에서의 일제저항은 기독교의 경우 존재론적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면 곧 반일(反日)자세란 구도가 자연 성립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독립운동은 어떤 의식분자라든가 민족의식의 특수층 운동이란 범주로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사건이다. 한국 기독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반일의 구도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요, 따라서 기독교회의 독립운동은 운명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일제 통치치하의 한국교회는 본질상 반일 독립운동의 존재양식으로 규정된다. 일제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합병초기부터 기독교 박멸이 총독정치의 제1과제였다."

박명수박사는 교육자 편에 수록된 고황경, 신태식, 유상근, 황희자, 문성모, 장종현을 중심으로 한 세미나에서 다음의 내용으로 강연한다.

"본 강연은 한국 교육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강연은 본 인물전에 나오는 자료들을 강연의 내용에 참가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다. 개개인을 자세하게 다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본 인물전에 나오는 기독교인사들이 한국 교육에 미친 영향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 인물전에 나오는 황희자 교수의 이야기는 기독교가 어떻게 여성교육을 시켰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감리교목사 이지성은 딸들에게 신식교육을 시켰고, 이들은 각각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분명하게 감당하였다. 이경옥은 한국 최초의 여성택시기사로, 이 애내는 음대교수로, 이우라는 한국은행직원으로(황희자 교수의 어머니), 이순희는 이대성악교수로, 이보배는 무용을 전공하였다.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국 기독교는 음악교육의 중심이었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중 결코 비교대상이 없는 분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양음악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경교육과 함께 찬송가를 가르쳤고, 교회마다 서양악기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런 연고로 기독교회는 한국사회에 서양음악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특히 한국의 피아노교육은 김영환으로부터 시작된다. 1893년 평양에서 신자가 된 장영환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김영환제자들은 한국의 음악을 이끌었다. 홍난파가 그 중 유명한 인사라면 이애내와 안병소도 있다. 이 애내는 피아니스트로, 안병소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본 인물집에 나오는 황희자의 이모이다). 이애내는 이대교수를 하다가 숙대음대를 창설하고, 초대 학장을 지냈다.

해방이후 미군정에서 한국의 교육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 물론 미군정의 락카드 대위가 책임자였지만 한국인 문교부장은 초기에는 유억겸, 후기에는 오천석이었다. 유억겸은 유길준의 차남으로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대표적인 기독교지식인이며, 오천석은 미국유학을 다녀온 감리교 목사의 아들이다. 미군정은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여 교육전반에 관한 자문을 받았는데, 위원회 10명 가운데 5명, 현상윤, 유억겸, 백락준, 백남훈, 김활란, 윤일선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구가 전체인구의 2-3%밖에 되지 않는 상황 가운데 기독교인이 반절이나 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미군정은 보다 원활한 교육을 하기 위해서 조선 교육심의회를 구성하였는데, 전체 63명의 위원 가운데 31명이 기독교인이었다.(여기에 본 인물전에 나오는 고황경박사도 위원이었다.)이것은 미군정 당시의 한국교육을 기독교가 거의 담당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본 인물집에는 해방 이후 미국의 선교부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고황경박사의 서울여대와 신태식박사의 계명대학이 나오고 있다. 고황경박사의 할아버지는 소래교회 출신으로 장로교 조사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세브란스의 의사였다. 미국 유학을 경험한 고황경은 이전교수였다가 해방 후 경기여고 교장 겸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약을 하였다. 고황경은 1960년대 장로교 총회의 결의로 오늘의 서울여대를 만들었다. 신태식박사는 경북에서 태어나 해방 후 대구에 계명대학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원래 계성고교의 영어선생이었는데, 해방 후 미국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북장로교선교사와 함께 대구에 계명대학을 설립하였다. 계명대학은 그 뒤 동산병원과 합병하여 대구지역의 기독교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백석대학교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 설립자 장종현은 교단이나 선교사의 배경이 없이 신학교를 설립하였다가 나중에 장로교 합동비주류의 신학교로 만들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일반 기독교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선교사나 교단이 세운학교는 아니지만 한국의 대학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기독교대학을 표방하고 있다.

본 인물집에는 명지대의 유상근과 세종대학의 최옥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충남 부여에서 성결교회신자인 유상근은 철저한 신앙과 반공정신을 가진 자로서 1955년 당시 천주교재단이었던 서울여자초급대학을 인수하여 오늘의 명지대학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 뒤에 팀선교회가 운영하던 관동대학을 인수하였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해방 후 승동교회 교육관에서 시작된 세종대학을 세운 최옥자는 1949년 서울여자가정교육사범학교로 시작되었다가 수도여자사범학교로, 현재는 세종대학으로 바뀌었다. 최옥자는 미국 연합감리교에서 안수를 받고, 학교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자 노력했다. 유상근과 최옥자는 다같이 교단이나 선교부와 관계없지만 개인적인 신앙으로 기독교정신을 갖고 기독교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성협 #세계성령중앙협의회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 #한국기독교성령백년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