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병길 목사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란 그 분 곧 하나님의 얘기(His Story)라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예언적인 사실을 부인하면서 과학 만능에 심취되어 보이지 않은 세상을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5-28)라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성경과 꾸란에서 보는 역사관은 어떠한가?

첫째가 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꾸란과 비교하면 역사성이라 할 것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역사관은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는 계획된 프로그램’이라 한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되고 있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18: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예수는 로마병사들에게 잡히던 순간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용감성과 자신을 위한 뛰어난 기질을 무시해 버리고 ‘네가 이렇게 한다면 이렇게 되리라 했던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책망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의 프로그램이 인간역사에서 바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프로그램을 벗어나려고 인간의 사랑과 동정으로 대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본질적인 의도를 모르고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부활한 직후 엠마오 길에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한다. 예수가 태어나기 천년전, 칠백년 전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전인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기록된 내용을 설명하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역사성이고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거대한 프로그램에 의하여 직접 이 땅에 온 삼위일체 성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예수를 중심으로 역사가 BC와 AD로 구분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2012년 전 그 예수가 이 땅에 왔다가 부활해서 가셨고, 앞으로 다시 온다는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7-8)"

둘째 기독교와 이슬람은 하나님의 역사의 법칙과 연계되어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과 헤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아브라함이 서자인 이스마엘과 본처의 적자인 이삭을 놓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선택하고 이스마엘은 집에서 내보낸다. 한 집안에 다른 피가 섞일 수 없도록 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역사가 계속된다.

이삭도 쌍둥이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을 두고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했던 에서를 멀리하고 동생 야곱을 선택하게 된다.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면서 열두 아들을 낳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혈통을 이어가게 된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면서 시작된 인류역사의 한 법칙이 성경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가인과 아벨, 아브람과 아브라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율법과 복음, 그리고 이스라엘과 교회에 이르는 한 법칙에 연계됨으로써 '참 빛'으로 왔던 예수를 발견토록 하는 길을 예비하고 있으며, 사도바울 역시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이스마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이삭)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4:22-30)”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났는데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다는 내용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음의 후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지만, 율법의 자식인 종은 그 집에 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기독교 의미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얻은 영혼이 아담을 통해 물려받은 육체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많은 수의 서자들의 후손인 아랍이 하나밖에 없는 적자인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오늘날 중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기독교적인 시각이라면 꾸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데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꾸란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면서 부인들에 대해서는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할 것을 전제로 함으로써 이스마엘이 장자이며, 이삭은 이스마엘을 희생양으로 드린 은혜로 주어진 아들로서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잘 못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왔던 예수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라는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만일 너희들이 고아에게 공정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면 누군가 마음에 드는 두 명, 세 명,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해도 좋다. 만일 공평하지 못한 생각이 들게 된다면 한 명의로 한다든가 너의 오른손에 소유하고 있는 것(노비)으로 하라. 그러는 것이 불공평하게 될 염려가 없다"(꾸란4:3).

이 구절은 이슬람 초기 두 번의 힘겨운 전쟁에서 수많은 남자 군사들이 죽음을 당한 후에 내려진 계시다.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과부들과 고아들이 생겨났고, 그들에게 고통이 가해지자 일부다처제는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이른바 사회보장차원에서 행해진 제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의 숨겨진 의미는 부인과 부인 사이에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부인에게서 낳든지 가장 먼저 태어나는 아들이 장자이기 때문이다. (계속)
 
문병길 목사 (엘림교회 선교목사,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종교근본주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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