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목사
박종화 목사 ©기독일보

최근에 어느 신학대학원 학생이라고 하는 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모든 목사님에게 쓴 것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데 주일에 목사님들이 제일 안식일을 위반하고, 쉬지 않고 많은 일을 하고 다니시며 교회도 일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일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제발 안식일을 지켜주십시오.’ 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 계시도 있나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쉬는 것이고, 무엇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안식일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하는 유대 백성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전도를 하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율법을 위반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며 비판을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요약하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인 마음대로 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논쟁을 벌였으나 제가 보기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대답에 대해서 선뜻 확신도 없었고, 대답이 옳았다고 못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그 말씀을 속에 담고 있다가 해답을 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쓰신 글이 있는데 오늘 여러분께서 봉독해서 알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주로 믿으시지요. 여러분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여러분이 편지입니다. 편지를 쓰실 때 먹물로 쓰지 않으시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쓰셨습니다. 돌판에 새긴 편지가 아니고, 여러분의 가슴판에 쓰신 편지입니다. 문자로 쓰시지 아니하셨고, 영으로 쓰셨습니다. 여러분은 편지입니다. 그 편지 속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도 쓰셨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렙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을 때 돌판에 열 가지를 적어서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 돌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 보관했고, 돌판에 쓰인 열 가지 계명, 그걸 해석한 법조문, 이 모든 율법들을 함께 고이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국가의 기조요, 종교의 기초요, 신앙의 모든 기반으로 돌판에 쓰인 채로 갖고 살았습니다.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판을 가지고 금과옥조처럼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행하는 안식일 계명을 보고 분노를 합니다. 왜 안식일에 일을 합니까? 먹는 것도 일이랍니다. 돌판에 쓴 글자를 율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여기서부터 사도바울 선생님이 중요한 단추를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을 돌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과 행하라는 말씀을 여러분의 살아있는 가슴판에 썼다고 생각하면 하나님 말씀이 달리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은 객관적 진리입니다. 객관적 진리를 돌판에 담아서 박물관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역사책에 기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국가의 신조로, 개인의 모든 신조로 문맥화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타당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있다가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과 여리고로 가는 길 와중에서 강도를 만나 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강도 만난 사람도 도와주고 자선을 베풀라고 했는데 돌판에 쓰인 율법을 믿는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돌판 율법의 눈으로 보면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아마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은 나는 지금 죽어가는데 당장 병원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충성 때문에 나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나는 돌판에 율법이 쓰여 있는지 모르는지 객관적 진리인지 아닌지 모른다. 지금 당장 이 곳에 사람이 강도 만나서 쓰러져 있다. 내 가슴이 뛴다. 내 눈으로 봤다. 손으로 만져 보았다. 발로 그 사람을 등에 업고 나는 병원에 가야 한다. 나는 도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진실이 지금 내 가슴에 뛰는, 두뇌로 생각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결단으로 이 사람을 돕기로 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은 개인적인 주관과 판단으로 사람을 도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은 객관적 진실 때문에 피했고, 사마리아 사람은 철저하게 주관적 감성과 판단 때문에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새 율법을 주겠는데 객관적 진실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곳에서 현실화 하고 느껴야지, 진실을 박제화된 진실로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이 없느니라. 진실을 거부하시는 예수가 아닙니다. 진실을 믿으면 철저하게 주관자 결단에 의해서 신앙의 결단에 의해서 지금 바로 이 시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가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오늘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박제된 진실로 보지 마시고 안식일 계명을 여러분의 가슴에 썼으면 여러분의 손가락에 쓰고 발가락에 썼다고 믿으시면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하나님이 진실로 기뻐하시는 그 뜻을 오늘 나가서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시면 됩니다. 제가 안식일을 이렇게 해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하나님, 동의하십니까? 박물관의 진실 말고 살아 움직이는 지금 이곳의 진실을 지켜보십시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판에 쓴 하나님의 편지를 갖고만 다니지 마시고 지금 편지를 읽어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편지대로 사십시오. 흔히 우리가 철학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 라틴 말로는 ‘히크’, ‘에트’, ‘농’ 지금 여기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실존, 지금 이곳에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 기독교가 말하는 진실, 모든 것을 이렇게 말해봅니다. 객관적인 거대한 담론으로 보는 것을 뒤로 젖히시고 제가 ‘지금, 이곳에’, ‘히크, 엔, 농’ 지금 오늘 이 곳에서 제가 살아있는 실존 속에서 그 말씀을 제 가슴을 담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고백하고 나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한 번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과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의 말씀과 한번 비교하시고 교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 세계를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실존 속에서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그리고 고백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아마 이 말씀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더라. 아니,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돌판에 쓰신 게 아니라 가슴판에 쓰셨기 때문입니다. 제 실존 속에 하나님이 늘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답니다. 확신하십니까?

불확실성의 시대, 불신의 시대가 지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그 기도는 힘이 있을 것이고, 나는 박제된 진실이 뭔지 모른다고 기도하시면 아마 그런 유머는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머 한번 배워봅시다. “하나님이 준비하셨단다.” 그러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슴 속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살아있는 삶 속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믿으시면 하나님께 진실로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만 아니라 온 세상의 살아있는 가슴들 속에 하나님이 말씀을 쓰십니다. 구원을 받게 하시는 준비된 말씀입니다. 사람을 찾읍시다. 가슴을 찾읍시다. 주님의 말씀을 쓸 가슴 말입니다. 주님은 어디에서나 항상 말씀을 듣고 선교에 나서는 우리와 함께 기다리십니다. 일어나 갑시다. 아멘.

/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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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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