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달 23일 경기도 안양시 안양감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제51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사사도행전의 주제와 구조에 관한 고찰 -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을 중심으로 -'를 주제로 발표한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 장석조 박사의 발제논문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장석조 박사(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신학)

III. 사도행전에 나타난 주 기독론의 의미와 기능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 tou/ qeou/)는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통계적으로 매 우 적게 나타나지만(행 1:3, 6; 8:12; 14:22; 19:8; 20:25; 28:23, 31),26) '주' 칭호"는 누가복음과 비교 할 때 거의 비슷한 회수로 등장한다. 특히 '주'는 하나님의 호칭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호칭으로도 사 용된다. 특히 '주'27)는 사도행전의 구조에서 주제적 기능을 하며 사도행전의 주제인 하나님나라와 밀접하게 사용된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주 기독론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의 기능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우선적으로 그 중요성은 사도행전이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합된 주제로 시작하고(1:6) 마친다(28:31)는데 있다.

주(Ku,rie) 1:6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 1:6 하나님의 나라(h' basilei,a tou/ qeou/) 24:31
주 예수 그리스도(τὰ περὶ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υ) 24:31

1. 사도행전 1:1-6:7에 나타난 주 기독론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행전의 주제로 1장 6절에서 처음 명시된다. 그 후 전자는 제1단원(1:1-6:7)을 마치는 요약구절인 6장 7절까지 사용되지 않고, 후자는 계속해서 사용된 다. 사도행전 1장 6절의 질문이 하나님나라의 때와 회복 영역에 대한 사도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이루어내실 주님에 대한 확신은 충분 히 담겨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눅 17:20-22; 19:11-27; 24:21).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거의 핵심이요 동시에 구원받는 믿음의 핵심이 된다(행 1:22; 2:31; 4:33). 칼빈이 주석하듯이,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 (예수)"를 부르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자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나 '부활'이 언급 되는 구절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있거나 완성될 표적으로 기능한 다.30)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은 복음을 '약속과 성취'로 설명하려는 누가의 의도에 적절하 다(눅 1:1-4).

"주 예수"(o' ku,rioj VIhsou/j)는 사도행전 1장 21절에서 두 번째 언급된다. 베드로는 예수 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그의 승천까지 경험한 후 예수님을 주님으로 호칭한다. 부활과 승천 등 구속사역의 전개에 따라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장 6 절의 질문은 사도들의 무지를 부정적 의미로 보기보다는 구속사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이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긍정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증거해야 할 대표적인 구속사역은 "예수의 부활"이다. 베드로는 사도의 필수 자격을 요한의 세례, 즉 예수님의 공적 행하심과 가르침을 시작하실 때부터 그의 부 활과 승천까지 사도들과 함께 출입하며 체험한 목격자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 모든 일들 중에서도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증인이 되게 "하여야"(dei/)함을 대표적인 사역 으로 삼는다.

"주 (예수)"가 사도행전 1장 24절에서 세 번째 언급된다. 사도의 보궐선거를 위해 베드로와 함께 모인 예루살렘교회도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후 "주님"으로 호칭하면서 기도했다. 사도적 교회는 부활과 승천의 주님을 부르면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경험한다.

사도행전에서 "주 (예수)"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언급은 사도행전 2장 34, 36절이다(행3.18-19; 4:33; 5:14; 19.20).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이시다는 기독론적 복음31)을 선포한다. 여 기서 예수님의 승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는(마 28:18, 빌 2:11참고) "주" 의 천상적 등극으로서 구약의 등극시 시편 110편의 예언이 성취된 구속사역으로 설명된다. 누가는 "주" 기독론의 결정적 선포를 위하여 1장에서부터 예수님의 승천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1:2, 9, 11, 22).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성령 충만을 경험한 후 예수님 이 지상사역의 결정적 국면에 가르치신 가르침을(눅 20:42이하) 제대로 깨닫고 계승하는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나 원래 다윗보다 먼저 존재하셨던 초월적 선재의 "주" 이시다.

사도들은 부활과 승천의 주님을 경험하고 승천의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가서야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하는 그 좁은 기독론의 우물에서 탈출하여 시편 110편 을 성취하는 다윗의 주님으로서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우주적 "주"님 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으로 전파하고 그것을 완전히 계시하시고 성취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를 점진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주제를 펼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누가가 왜 사도행전의 주제로 명시한 "하나님의 나 라"를 1장 6절에서 명시한 이후 첫 대단원을 마치는 요약구절인 6장 7절까지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왜 8번밖에 사용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여기서 주 기독론은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고(1:8) 베드로는 성령 받음(2:1-4)이 승천하신 주님이 부어주신 결과 (2:33-38)로 선포한다. 성령을 받은 사도적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가장 명시하는 표현인 주 기독론을 복음을 선포한다.

조영모32)는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하나님 나 라와 성령이 함께 언급된 구절들까지도(눅 4:16이하; 행 1:3-8; 8:12-15, 29-40; 19:1-8; 20:22-25; cf. 눅 1:32-35; 11:1-13).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를 선포하기 위한 수단이나 원인으로 강조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도행전이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마치는 함축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성령의 임재가 주 기독론의 결정적 선포 원인이라면(행 2장) 성령받은 사 도적 교회는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하늘의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 험하게 된다. 물론 누가가 성령의 선포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주 기독론을 선포하는 원인이라면 성령의 구원론적 차원을 간과한다고 할 수 없다.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 이후의 시대를 반영하기에 주 기독론이 더 분명하다(행 1.21; 행 15.11;

20.35; 부활한 예수 1.24; 2.25 시16.8; 행 2.34 시 110). 특히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주 기독론은 부활, 승천, 성령부으심 등 승귀적 측면뿐만 아니라 능력 행하심과 고난과 죽음 등 비하적 측면을 포함한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첫 단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누가복음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에도 "주"33)는 신론적 칭호(눅 1:38, 46; 2:9)일 뿐만 아니라 기독론적 칭호로도 사용된 다(눅 1:43, 76).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서 초월적 주 기독론을 펼치고 있음을 잘 지적했다. 누 가복음의 서막인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기사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눅 1:43; 2:11, 26)으로 부르면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간접적으로 기독론적 신앙고백을 한다. 우리는 주 기독론 이 나타나는 누가복음의 첫 대단원(눅 1:1-4:13)의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기사에서 '하나 님의 나라'(h' basilei,a tou/ qeou/)가 처음 나타난다(눅 1:31-33)는데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여기 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다시 말하면 구 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주'로 불리는 것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는 주 기독론은 누가복음의 둘째 대단원(눅 4:14-9:50)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더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고 행하신 사역을 종말론적 하 나님나라의 사역으로 요약한다. 갈릴리에서의 하나님나라 복음 사역(4:14-44)에 대한 구체적인 결 과를 보여주는 단락에서(눅 5:1-6:16) 주 기독론은 죄인을 고백하는 베드로와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인자 기독론, 즉 예수님의 신성과 연결된다(눅 5:8, 12, 21, 24). 하나님나라의 복음 사역으로 모은 언약 백성들에 대한 가르침(6:17-49)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셋째 언급되고(눅6:20), 그 백성들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에 도취하여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주님으로 부를 뿐 만 아니라 그 나라의 언약백성답게 의롭게 살아야 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종말론적 현재와 미래의 긴장감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누가복음의 셋째 대단원(눅 9:51-19:27)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 복음 사역으로서 제자들이 주 예수를 부르는 주 기독론으로 시작하고(9:54, 59, 61; 10:17, 39-41), 명시된 하나님의 나 라와 연결된다(눅 9:60, 62; 10:9, 11).

사도행전의 첫 단락에 나타난 주 기독론은 예수님의 지상사역도 포함한다(행 1:1-2; 2:22-24). 예수님이 지상 사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베푸셨듯이, 승천 이후에는 사도적 교회를 통해 그 사역을 계속 하신다. 구속사역은 탄생부터 재림까지 점진적으로 계시되지만, 주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 구속사의 결정적 사역이 성취 되었기에 사도적 교회는 승천과 재림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 의 현재적 선취를 경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소망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거하는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 난 하나님의 나라와 주 기독론은 복음의 이중표현으로서 균형잡힌 종말론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 것은 재림 연기로 인하여 정치적 전복이나 타협을 시도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임박 한 재림을 소망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는데 힘을 다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2. 사도행전의 다른 단원들에 나타난 주 기독론

사도행전의 제2단원(6:8-12:24)을 도입하는 헬라파 스데반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계속 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요엘서의 예언(행 2:19)과 예수님의 종말론적 성취(행 2:22)가 히브리파 사도들을 통해서 반복되던 사건(행 2:43; 4:30; 5:12)을 상기시킨다. 본 단원의 특징은 그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새 출애굽 구원사건이 계속 진행 중인 것을 보여준다(출 4:21; 15:11; 사 8:18).

윤철원은 스데반의 설교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반영함을 바르게 말한다. 그 주장은 하늘 과 땅을 통치하는 하나님과 인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지 않고 하늘 성전(7:48)에 거하신다. 그의 통치 영역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이다. 성전이 의인의 죽음 (7:52)과 연결되는 것에 근거한다.

우리는 스데반의 복음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 주 기독론을 제안한다. 본 단원에서 처음 언급되는 '주' 기독론(7:59, 60)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승천의 주님을 가리킨다. 스데반은 하늘 성전에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면서 유대교의 성전 개념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개념조차 교정해주며 기독론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승천의 주님에게 죄 용서의 구원을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 적 성격이 죄 용서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제2단원(6:8-12:24)에서 '하나님의 나라'(8:12)는 헬라파 빌립의 사마리아 복음사역에서 사용된다. 사마리아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주 기독론으로 연결된다(8:16, 25). 그리고 이 것은 유대인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의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인 근거로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가장 중요한 주 기독론은 바울의 회심/소명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복음의 장애물에서 부활과 승천의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사도 적 소명도 받게 된다. 또한 회심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핍박의 주제는 사도행전의 구조에서 보았듯이 반복되는 주제다(8:1나-8:3; 9:1, 13, 21; 22:4,5, 19; 26:9-11). 이것은 복음의 말씀이 핍박의 고난을 뚫고 중단 없는 전진의 능력을 발휘함을 보여준다. 또한 의도적인 공식적 핍박의 주체인 바울의 회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성을 극대화시킨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눅1:76; 3.10; 5:1, 32; 행2:38)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누가신학의 기본 주제다.

사도행전의 제3단원(12:25-19:20)에서 두 번 언급되는 '하나님의 나라'(14:22; 19:8)는 주 기 독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14:23; 19:10). 이전과 같이 기독론적 목적을 위해 구약이 인용되고 있지 않다. 인용의 중단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해졌기에 더 이상 추가할 필요가 없기때문이다. 주 기독론의 구약적 근거가 충분히 다뤄졌기에 이제부터는 전제되거나 반영되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말씀', '길' 등 신학적 주제는 이사야 2장 2-4절이나 40장 3-5절에 나타난 '새로운 출애굽'을 종말론적 성취로 반영한 것이다(눅24.44; 행 1.8; 13.46; 28.25). Pao는 이사야 40:1-11의 네 가지 주제들 중에서 말씀의 능력이 우상숭배를 정복하는 점을 언급하지만, 우상숭배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특히 유대인의 반대와 연 결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일로 권하는 자신의 복음에 모두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유대인의 다수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만큼 기독론적 복음을 거절한 듯하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 새 출애굽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은 예 루살렘교회의 히브리파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으나 제2단원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헬라파 지도자에 의해 조금씩 수행되다가 이제는 완전히 안디옥교회에 의해 수행된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다루는 15장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주' 기독론은 우주적 새 이스라엘을 나타나는데 적절하다.

본 단원을 마치는 19장 17절도 그렇다. 19장 8절과 10절은 하나님나라와 주 기독론이 예루살렘교회와 사마리아교회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를 통합하는 복음으로서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에 참 여함(눅 4, 13, 14장)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의 넷째 대단원(19:21-28:31)은 바울에 의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20:25; 28:23, 31)는 주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0:19-35; 28:31). 특히 20장 21절의 주 기독 론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참여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이 믿어야 할 내용이다.

제2단원(6:8-12:24)의 바울의 다메섹사건에 나타난 주 기독론은 여기서 두 번 더 반복된다. 바울은 이방인선교와 율법문제로 유대인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는 문맥에 위치한 22장과 26장에서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이 율법에 기초한 하나님의 약속과 유대인의 소망의 한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밝힌다. 에버츠에 의하면, 22장의 다메섹사건 기사는 바울의 이방인선교사역의 유효성에 대한 바울과 유대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변증(22 장)에서 다메섹사건에서 경험한 회심과 이방인선교의 소명을 아나니아를 통해 인증받고 성전비전에서 주님을 통하여 재확인받았다고 변증했다면, 가이사랴에서의 변증(26장)에서는 다메섹 사건에서 경험한 회심과 이방인선교의 소명을 가장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유대인들의 고소의 뿌리가 되는 율법이 소망하는 부활을 공감대로 제시하며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것을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증거하면서 자신의 증거내용인 복음이 철저히 구약적임을 변증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누가는 바울의 회심에 근거해서 이방인을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에 포함해야 하는 신적 필연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의 주제인 주 기독론은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위한 복음의 내용으로 제시된다. 주 기독론이 정치적 무죄와 연결된 것은 부수적일 뿐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주제를 명시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언어적 장 치인 전치사 περί(뻬리, ~에 대하여)를 간과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 전치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명시적으로 언급하는데 사용된다(28:31). 이 두 개념은 바울복음의 요약으로서 예수님의 복음(1:1-3)과의 연속성을 명시해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복음

(1:6, 2:36)과 빌립의 복음(8:12)과의 연속성을 명시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믿고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신론적 복음과 그것을 성취하는 기독론적 복음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교회론을 세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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