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조성노 담임목사

어떤 청년 하나가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는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며 십계명을 말씀했고, 그 청년은 <그런 것은 이미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답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기 드문 모범청년이자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도 그를 보시며 사랑스러워 하셨다(막 10:21)고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의 관문을 통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뜻밖입니다. 그 청년의 삶에 여전히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며 <가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당시 현장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제자들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뇌에 찬 표정으로 주님을 떠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사실 오늘 우리로서도 다 그 청년처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자신 있게 결단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의 타당성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교회 현장에서 주님의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남아 있을까요? 너무도 부담스럽고 비현실적이어서 교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요건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탈락이라고 한다면 그 책임은 오히려 하나님 쪽에 있다고 보는 게 옳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과연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그 청년이 부유하다는 것은 분명 세상의 모든 부러움을 살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풍족함이 청년의 궁극적인 고민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며 도리어 영생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물론 주님이 여기서 문제 삼으신 것은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청년이 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청년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는 있었으나 왜 그래야 하며 무엇을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그 청년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지를 명쾌하게 깨닫게 됩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한다며 운을 뗐지만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자 영생보다는 재물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가 참으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이 없고 가난도 없으며 병마에 의한 고통도 없고 신음이나 눈물도 없는 영원한 평화의 표상입니다. 그 나라, 그런 가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해도 결코 <아깝지 않다>는 신앙고백과 결단이 마침내 그 나라의 문을 여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청년은 결국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근심이야말로 오늘 우리 모두의 번민을 대변한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아무런 고민도 없이 따를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주님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고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는 전혀 가당치 않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에 헌신하는 삶이 가능할 거란 믿음을 포기하지 맙시다. 거기에 바로 영생의 아름다움이 있음도 잊지 맙시다.

/노나라의별이보내는편지에서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성노목사 #노나라의별이보내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