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신학연구소장 이장식 박사(한신대 명예교수).

교회의 근본 신앙고백을 제외하고 교회의 예배를 비롯하여 모든 성례전과 직제와 교회의 합법과 규약 등등을 개혁하자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토론의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의 문제는 문화적인 문제인데, 중세기 교회는 중세기 문화의 유형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개신교는 현대 문화의 유형의 제도를 가지고 발전해 왔습니다.

중세기 문화일반을 개혁한 것은 15세기 이후로 일어났던 문예부흥운동이었는데, 2000여년전의 화합과 로마시대의 고전 연구와 함께 그 당시 인문주의적인 학문과 합리주의 사상을 복구 또는 부흥하는 운동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루터와 칼뱅과 기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그 문예부흥운동의 사상과 학문의 영향을 다소 받은 것이 사실이었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고전인 성서 연구를 인문주의 학문의 연구방법을 배워서 성서를 새롭게 연구하여 초대 고전시대의 교회를 복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희랍의 신약성서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찾아내어서 성서적 교회의 본질과 본성에 알맞은 교회제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적 그리고 초대교회적인 교회를 복구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을 초대교회 제도와 실천방법을 문자적으로 또는 형식그대로 단순히 재현하려는 환원주의적 개혁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하지 못한 것을 2000년 전의 초대교회 생활과 제도가 당시의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의 문화의 유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제도를 개혁하면서 중세 문화의 유형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예 부흥운동으로 달라진 현대 문화와 같이 전복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문화의 세속주의를 모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교회개혁운동이 가진 딜레마를 해결하는 끈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 길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력이 구시대의 지각을 헤치고 다시 태어나는 중의 노력을 해야 했는데 그 중생을 위해서는 교회나 신도들이 일상적인 습성(習性)을 버리고 영적 또는 내면적 심각한 번민을 겪으며 또 외적으로는 세속과의 힘든 온갖 투쟁을 해야만 했는데, 이 힘든 일을 사람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고 오직 성령의 감화와 인도와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회심의 과정에서 겪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세적인 신도나 교회지도자가 되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2000년 전 초대교회 신도나 교회지도자들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서 말씀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다시 태어났는데 그것은 그들을 깨우쳐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서의 글자(letters)가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의 문자가 그들의 귀를 두드린 것도 아닌데 성서를 읽고 그들이 새로운 교훈과 뜻을 찾은 것은 성령의 감화와 illumination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사람의 중생도 사람의 몸이 생리적으로는 절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성서의 문자적 말씀이 그대로 입을 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보이지 않은 성령의 영적 힘으로 소리치는 것이고 생리적인 사람의 고막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영혼의 보이지 않는 귀를 두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이치를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제도를 개혁할 필요를 느끼는 까닭은 이 제도들이 이제는 한갓 문자적인 것이 되어 교회를 죽이거나 신도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이고 있는 것인지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하여 변하거나 동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사건도 옛날 할 때 한 곳에서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이었는데 그 말씀과 그 일회적인 사건이 어떻게 모든 시대에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살아있고 그 십자가 사건의 사죄의 은총이 또한 어떻게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부는 바람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운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자기가 떠나면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많은 전통(제도)는 변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통은 맹목적으로 "hand down" 즉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전래된 잘못된 전통과 제도를 붙들고 "hand over" 즉 넘겨주고 넘겨받은 선택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득권의 권익을 누리고 새로운 운동을 물리치는 배타성과 폐쇄성을 가진 지도자들과 선생들이 성령의 새 바람을 싫어하여 문을 굳게 닫고 신선한 새 바람의 환기를 가로막으면 결국은 질식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서 굳게 닫힌 문들을 두드려 열고 들어가게 하십니다. 문을 두드릴 때 열지 않으면 바람은 다른 곳으로 불어가면 그 문은 언제나 닫힌 문이 될 것이 아니고 도둑이 밖에서 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물리친 유대인 민족과 종교는 마침내 강도의 습격을 받아 빼앗기고 집밖으로 쫓겨 나가서 흩어져 버리고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교회의 문을 뚜드리는 소리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문을 열어놓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혁할지를 놓고 의견도 많고 시도도 많이 하고 있는 줄 압니다. 성령운동가들은 성령을 모시게 하는 초혼(招魂)과 강신술 같은 운동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이와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하여 성령이 자유자재하게 바람처럼 불어서 필요한 곳과 사람들이 모인 데를 찾아가서 역사하시는 성령 자신의 운동을 벌려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우리에게 불어오셔서 역사하시도록 우리는 인간적인 교만과 아집과 온갖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의 오순절에 성령이 먼저 오셔서 사람들을 감화시켜 변화시키시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다른 나라 방언을 알아듣게 하여 하나가 되어 복음전도의 사명을 공감하여 흩어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새사람이 되는 것이 첫째가는 결과이고 그리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으려는 집회를 많이 합니다만 집회에 가야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하나남의 말씀을 읽고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개혁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모여서 연구하고 토론할 때 기존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고칠 필요도 있지만 그 보다는 교회 공통체가 날로 발전하고 변해가고 문화도 달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여 교회의 사회적 영향과 공헌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제도를 가진 공동체가 되도록 개혁하지 않으면 교세는 더 퇴보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 자체 보존과 교세확장이 아니고 선교적 교회제도로 바꿔야하고 또 교인들의 제자훈련 제도도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우리 사람의 지혜나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시대에 따라 새롭게 섭리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새로운 영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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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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