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 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11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열린 생명신학연구소(소장 김명용 박사) '제32차 전문위원세미나'에서 발표한 대전신학대학교 최성수 박사의 발제문을 연재합니다. 그 두 번째. <편집자주>

▲최성수 박사ㅣ대전신학대학교

■ 영화적 지각 행위의 신학적인 의미

영화는 지각 행위이며 또한 소통하는 매체다. 그러므로 영화를 신학적으로 이해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영화적 지각 행위의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는 일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성경에서 보는 행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처음 나타나는 보는 행위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보신 일이었다. 피조물을 보시고 좋았다(아름답다)고 평가하셨다. 보는 행위는 단순한 감각적인 반응을 수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미 뇌의 작용이 개입한 상태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피조물을 보시는 행위는 창조가 당신의 뜻대로 되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지각 행위로 표현된 고백에는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인간의 기대가 담겨 있다. 그 외에 표현된 하나님이 보시는 행위는 인간을 돌보시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시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에 대한 인간의 기대를 반영한다.

이에 비해 인간이 보는 행위는 다의적이다. 성경 특히 구약에서 보는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예언자를 선견자로 불렀다. 선견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역사 곧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세계 내 각종 사건과 현상들을 보고 하나님의 행위와 뜻을 간파하여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일로 선택받은 자였기에 현실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예언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만이 아니었다.

욥은 고난당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 듣기만 했던 욥은 고난 후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고백한다(욥42:5). 그의 고백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의미와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에 있어서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하나님을 환상 중에 보았다는 말로 이해할 이유도 없다. 예수님이 의심하는 도마에게 하신 말씀, 곧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결론 내릴 이유가 전혀 없다. 욥의 고백은 다만 고난의 경험을 거치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새롭게 혹은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보는 행위는 단지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더욱 새롭게 알도록 해준다. 모르는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아는 것만을 볼 뿐이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구약에서 '본다'는 동사에는 '안다'는 의미가 있다. 보는 것은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말은 성적 관계를 의미할 정도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포함한다. 그런데 본다는 의미의 동사가 비록 '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해도, 친밀한 관계를 가리키는 '안다'는 말과는 다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이 곧 친밀한 관계를 함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창세기 3장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이야기에서 사용된 동사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눈이 밝아짐'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눈이 떠진다는 말인데, 새로운 경험의 순간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된다. 시편 기자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기도한 맥락과 일치한다. 창세기에 사용된 말은 의미적으로 선악을 분별할 능력을 갖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나중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우리와 같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눈이 밝아진 것과 선악을 아는 일은 서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보는 행위에 아무런 여과장치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을 옳다고 판단하는 행위로 이어지게 한다는 말이다.

겉보기에 인간의 타락은 보는 행위에 집착함으로써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보는 행위는 단지 유혹일 뿐, 타락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보다 세상을 판단하며 살려는 의지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려는 욕망에 있다. 물론 보는 행위로 시험에 든 사람들의 경우들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온다. 보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평가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다. 다만 보는 행위를 통해 유혹을 받았음을 환기한다. 이것은 인간이 그만큼 보는 행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눈을 생물학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뇌라고 말할 정도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대단히 민감하게 작용한다. 보는 것은 뇌의 작용에 따르기 때문에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는 것만큼 보게 된다. 창세기의 의도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은 은혜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유혹에 넘어지는 길임을 경고하는 데에 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도 예수님께 세상의 영광을 다 보여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셨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 독사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긴 장대 끝에 놋 뱀 형상을 보도록 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살았지만, 보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놋 뱀 형상에서 구원을 본 사례에 비춰 예수님은 십자가를 보는 일에 구원론적인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신 것들을 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바탕으로 보는 것이 문제다. 세상을 밝게 보는 것과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은 은혜다. 세상을 보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볼 때 가능해진다(민13-14). 그렇지 않고 욕망을 갖고 보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라도 사탄의 시험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와와 발람 선지자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세상을 보는 행위는 단순한 감각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지각 과정과 인식체계, 인간의 욕망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인간과 세상을 보는 지각 방식을 보고, 인간과 세상을 인식하는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과 세상을 향한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건은 다만 세상을 어떻게 보고 또 무엇을 근거로 보느냐다. 바로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다. 인간의 지각 행위는 신학적으로 무엇인가?

사실 보는 행위 자체는 신학적이지 않다. 단지 정보를 수용하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지각 방식과 매체가 관건이다. 어떻게 또 무엇을 매개로 지각하느냐에 따라 신학적일 수 있고 비신학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보느냐 인간의 욕망에 따라 보느냐에 따라 지각이 달라진다. 지각 행위로서 영화가 신학함의 한 방식이 되기 위해서는 영화를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 그리고 약속과 관련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놋 뱀 형상을 보고 구원을 경험했듯이, 그리고 그것의 외연적인 범위를 넘어 구원의 의미인 십자가를 보았듯이, 물질적인 스크린에서 그리고 스크린 위의 이미지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혹은 행위를 지각할 수 있다. 기독교 영화라면 영화감독의 신학함과 관객의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이뤄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객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독해 및 성찰능력에 좌우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 그리고 그분의 약속에 근거해서 볼 때 비로소 지각 행위는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기계적인 지각 행위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영화는 다만 인간과 세상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이야기할 뿐이다. 신학함은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보는 방식에 따라 인간과 세계를 보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인간과 세계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진정성을 갖고 말하는 한, 관객은 신학적인 성찰을 통해 영화적인 시각을 검토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화에 함의해 있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갖는 일반계시적인 성격이다.

영화적 인간론을 정리하고 영화적인 매체를 통한 인간 이해를 신학적으로 조명하려는 이유는 허구 세계인 영화가 인간을 보고 이해하는 지각 방식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형성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재현된 혹은 묘사된 인간은 일차적으로 카메라의 시점 곧 기계장치를 거쳐 형상화된 것이기 때문에 재현, 왜곡, 조작 등이 일어날 수 있다. 영화는 욕망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영화 속 인간을 현실의 인간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영화의 욕망을 무시하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고 또 재현되었는지를 간과하면, 실제적인 인간 이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발라즈는 영화가 심지어 인간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영화 예술이 우리 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까닭은 "영화가 대중적인 정신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특히 도시에서 사는 대중들의 정신 상태가 .... 이 예술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산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상문화인 영화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적 인간학은 영화 속 인간 이해에 담긴 인간의 지각 관습 혹은 지각 방식을 탐구하면서 지각의 주체로서 인간을 묻고 동시에 영화를 통한 인간 형성의 적합성을 따진다. 따라서 영화적 인간 이해는 반드시 비평을 필요로 한다.

■ 영화적 인간 이해의 주요 특징들

영화의 매체적인 특성에 바탕을 둔 영화적 인간론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보다 영화적으로 인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또한 실천된 인간 이해의 근거를 묻고 또 인간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주목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먼저 영화적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인간 이해의 특징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영화적 인간 이해의 특징은 무엇보다 인간을 지각할 때 기계장치를 통한다는 사실과, 특히 현실의 인간을 관찰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간 혹은 캐릭터를 관찰대상으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인간 이해는 인간을 지각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카메라는 지각의 한계를 극복시키지만 또한 지각을 한정하기도 한다. 영화는 장치를 통한 지각을 현실로 인지하게 한다. 이로써 현실 변화의 노력에 참여하고 공적 담론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의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적 인간 이해의 또 다른 특징은 캐릭터가 무한히 변형 가능하다는 것이다. 배우에 따라 연기가 달라질 수 있고, 또 CG와 애니메이션을 통한 작업은 캐릭터의 변신에서 무한한 자유를 보장한다. 이를 통해 소위 '인간 형성'이 가능해진다. 영화는 현실의 인간을 캐릭터의 형태로 반영하지만, 또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영화적인 편집을 거쳐 새롭게 구성된다. 곧, 영화는 현실의 인간을 반영하면서 그것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면서 현실을 재구성한다. 이런 특징에서 영화의 욕망은 더욱 도드라진다.

한편, 감독의 사상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류는 영화 속 인간을 감독의 인간 이해와 무조건 동일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양자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영화가 당연히 감독의 인간 이해를 반영한다 해도, 몽타주 이론이 말하고 있듯이, 때로는 장치를 거치는 과정에서 혹은 편집과정에서 감독이 예상하지 못했던 인간 유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영화로 받아들이는 결정은 감독이 내린다. 영화 속 인간과 감독의 인간 이해 사이에는 변수가 발생할 수 있고, 또한 영화 속 인간에 대한 관객의 경험에서 새로운 이해가 현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적 인간론은 철저하게 영화적으로 구성되고 표현된 인간-이미지만을 대상으로 한다. 예상치 못한 우연한 이미지 발생과 관객과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미지 출현도 고려된다.

영화 속 인간 이해는 보는 것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영화적인 관찰을 결정하는 기계 장치가 인간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그리고 편집을 통해 인간 이해를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후에 서사적인 측면, 곧 장르와 주제적인 측면에서 발견되는 인간 이해의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계속>

발제ㅣ대전신학대학교 최성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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