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린빌신학교 총장 죠셉 파이파 목사   ©기독일보 DB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박사) 제29기 정기세미나가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설교'를 주제로 23일부터 26일까지 세곡교회(담임목사 박의서 목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세미나 주강사로 초청된 미국 그린빌신학교 총장 죠셉 파이파 박사는 첫째날인 23일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설교'를 주제로 강의했다.

파이파 박사는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TV의 언론매개체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시대를 만들었으며 진득하게 앉아서 논리적인 강연을 듣는 것을 할 수 없는 시대를 창출했으며 사람들은 영상에 매료되어 있고 감성적인 메시지에 쉽게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우리의 위기가 놓여있다"며 "우리들 대부분은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고 배워왔다. 종교개혁 이후 모든 교회가 설교사역을 가장 우선되는 사역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TV에 의해서 구닥다리로 전락되어버린 설교전달 매체를 계속 진행할 수 있겠는가?" 질문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존 스토트 목사의 글 'Between Two Worlds'를 인용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들을 능력도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설교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는가?...본질적인 비밀은 기교적인 면을 습득하기보다는 어떤 확신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이 방법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습득해야 할 설교의 원리들이 있고 발전되어야 할 실제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기 쉽다. 기교는 우리들을 변사들이 되게 할 뿐이다"

그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도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며 그 글도 인용했다.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서 강의하거나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될 때 종종 벌어지는 현상은 즉각적으로 방법론이나 기교나 수단들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는다...왜냐하면 내가 정말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짜 문제는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죠셉 파이파 박사는 "이번 강좌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상태나 시대의 문화적 흐름이 어떠하든지 간에 설교를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집중하고자 한다"며 "성령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설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 신(神)의 공식적인 대변자, 전달자 '케룩스'

그러면서 그는 설교의 네 가지 요점을 제시하며 "설교란 소통의 독특한 방편이다. 독특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독특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설교란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먼저 '설교 행위는 전달(소통)의 독특한 형태이다'는 점을 설명하며 "설교란 설교하도록 임명된 자에 의해서 권세 있게 공적으로 구어적인 선포라는 차원에서 독특한 행위이다. 소통의 독특한 형태는 디모데후서 4:2 절에 '케룩소'라는 명령어의 사용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 케룩소(Kerukso)는 케룩스(Kerux)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케룩스는 전달자라는 말이며 케룩소는 전달자의 행위 즉 설교행동을 뜻하는 말이다"고 했다.

그는 "전통적인 헬라 문화에 있어서 전달자는 왕이나 장군 심지어는 신(神)의 공식적인 대변인이었다. 그는 신들이난 그를 보낸 이의 권위 하에서 행동하였다. 실제로 신들은 허메라는 대변인을 두고 있었다"며 "사도행전 14장 12절에서 리스드라에 있는 이교도들이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제우스의 수석 선포자인 허메라고 부른 장면을 본다"고 했다.

이어 "전달자는 공적인 포고문을 전달하고 전쟁시에 협상한 내용들을 전달한다든지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한다"며 "그 칭호는 또한 철학자들에게도 주어졌다"고 했다.

죠셉 파이파 박사는 '전달자'를 뜻하는 '케룩스'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먼저 "구약성경은 선지자 직임을 위하여 전달자라는 의미의 케룩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은 두번 이 단어를 전달자의 사역을 설명하는데 사용했다.(창세기 41:43, 다니엘 3:4)"고 했다.

■ 케룩소 : 목소리를 내는 것·외치다·큰 소리로 외치다

또한 "70인역 번역가들은 케룩소를 구약의 세 단어들로 번역했다"며 "첫번째는 아바콜(abarqol)이라는 단어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출애굽기 36:6, 역대하 36:22) 케룩소는 또한 카라로도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는 선포하다 또는 외치다라는 말이다. (요나 1:2, 요나 3:2, 4, 출애굽기 32:1) 케룩소에 해당하는 세번째 히브리어는 '루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스바냐 3:14, 스가랴 9:9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큰 소리로 외치다' 혹은 '부르짖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죠셉 파이파 박사는 전달자를 뜻하는 '케룩스', 전달자의 행위를 뜻하는 '케룩소'를 설명하며 동시에 '케리그마'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선포의 산물'이라는 뜻이라고 말하며 때로는 '선포행위'를 강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구약에서 '케리그마'의 사용에 대해 설명하며 "(칠십인역에서)케리그마는 히브리어 동사 '카라', 명사 '큐레아' 관용구 '아바르 콜'을 번역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그 용어들은 구어체 형식으로 전달되는 선포를 의미하는 말들이다.(역대하 30:5)"며 "칠십인역 전반을 통해서 '케룩소'와 '케리그마'는 구어적이고 공적인 선포의 개념을 담고 있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신약성경을 통털어 저자들이 '케룩소'를 설교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음을 보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마가복음 1:4절의 세례요한의 설교, 마가복음 1:14절의 예수님의 설교, 마가복음 3:14절의 사도들의 설교가 그것이다"며 "그러나 몇몇 사례는 케룩소가 설교행위를 묘사하지 않고 여전히 구음으로 공적 선언을 가리키고 있다(막 1:45, 7:36, 눅 8:39, 12:3)"고 말했다.

신약에서 '케리그마'는 종종 '설교자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마 12:41)며 강조점이 다른 경우에 있기도 하지만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와 상관없이 공적으로 구음으로 선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고 했다.

■ 케룩소 : 신약성경의 '유앙겔리조', '디다스코', 마리뚜레오'와 차이

또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을 묘사함에 있어서 여러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며 '유앙겔리조', '디다스코', '마리뚜레오'라고 소개하며 "유앙겔리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좋은 소식에 대한 선포이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의 명사형 '유앙겔리온'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때로 성경의 저자들은 유앙겔리조를 설교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눅 4:18, 고전 15:1~2)"고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 4절, 35절 등에 쓰인 '유앙겔리조'라는 단어는 문맥에서 설교로 번역하지 말아야 한다며 전자는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방편을 내포하고 있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후자는 "한 개인에게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차이에 의해서 우리는 비록 유앙겔리조가 사적인 대화의 형태와 복음 사역의 다양한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지라도 '케룩소'는 오직 구음으로 공적 선포를 나타낼 때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가르친다는 의미의 디다스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학자인 C.H Dopp는 케리그마와 디다케(가르침, 디다스코의 명사형)의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했다"며 "그의 논문에서 케리그마는 사도적인 복음 선포를 말하고 디다케는 교회 안에서의 설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설교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선포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죠셉 파이파 박사는 "신약의 저자들은 케룩소/케리그마, 디다스코/디다케를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도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설명함에 있어서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였다"며 "비록 나는 도그 교수처럼 케리그마와 디다케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것을 따르지는 않아도 하나의 구분은 있다고 본다"고 했다.

■ 설교도 가르침의 요소 내포…가르침이 다 설교는 아냐

이어 "설교도 항상 가르침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가르침이 다 설교는 아니다. 또한 가르침은 다양한 방법론들을 사용할 수 있다.(철학적인 질의문답, 토론 및 영상매체 활용 등)"며 "그러나 설교는 언제나 구음이다. 공적인 선포이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가르칠 때 우리는 두서너 가지 가능한 해석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청중들에게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불확실한 상태에 남겨두기도 한다"며 "그러나 설교는 언제나 권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강조했다.

이외 그는 "케룩소와 증거한다 혹은 확정한다는 의미의 마르투레오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며 사도행전 1:8, 1:21~22, 요한일서 1:2절을 제시하며 "그 특징적인 늬앙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적인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설교에서도 분명히 개인적인 증언의 요소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증언의 내용은 설교와는 다르다. 우리는 간증을 설교행위와 동의어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죠셉 파이파 박사는 "설교가 전파하고 가르치고 증언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지만 설교와 혼돈해서는 안되는 복음과 교리적인 전달의 독특한 형태들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며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구음의 공적 선포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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