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솜니 목사(올리브교회 담임)   ©올리브교회

본문: 누가복음 19:1~10

어린시절 학교나 교회에서 연극에서 선생님이 배역들을 정해줄 때면 속으로 내심 비중있는 역할을 바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본을 보면 비중있는 배역은 철수, 영희와 같이 실명이 거론되는 반면 엑스트라는 행인 1, 행인 2 하는 식으로 언급되었다. 그래서 연극이나 영화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그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향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4명의 등장인물을 만났지만 성경은 그들의 실명을 언급하지 않았다. 2천년 동안 그들은 그저 거라사의 광인, 백부장, 혈루증을 앓은 여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만 불려졌다. 이는 그 스토리에서 어느 한 개인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그들이 한 행동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특이하게도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단순히 여리고의 한 세리장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실명까지 거론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에서 이 인물의 실명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였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여리고   ©원솜니 목사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여리고는 매우 부정적으로 자리잡은 도시이지만 여리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약 기원전 8천년 정도에 최초의 도시가 세워졌으며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어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중심도시였다. 고대의 여리고는 향유의 주원료로 사용되던 발삼(balsam)으로 유명했다. 향유의 가격이 매우 높았지만 그 중에서도 여리고의 발삼으로 만든 향유는 최고급품에 속했는데 헤롯은 예루살렘성전과 같은 막대한 건축사업비용을 바로 이 여리고 발삼을 거래한 수익으로 충당했다. 또한 여리고는 사해와 인접하고 있어 유황, 역청, 소금 등이 매우 풍부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경제적 요충지였다. 한때 클레오파트라가 연인 안토니우스에게 부탁해 여리고의 발삼농원을 소유했었고 이후엔 헤롯대왕이 소유하면서 여리고에 자신의 겨울 궁전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헤롯의 겨울궁전 유적지   ©원솜니 목사

이처럼 고부가가치 상품이 활발이 거래되고 상인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보니 세금의 수익은 막대했으며 가이사랴, 가버나움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지역의 3대 세무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여리고의 세리직은 매우 중요한 관직 중 하나였고 그들에 대한 여리고 주민들의 미움도 컸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주일학교 아이들에게까지 매우 친숙하다. 그 친숙한 줄거리는 이렇다. 여리고라는 동네에 한 세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방문하신다는 소리가 들리게 되자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거리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고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꾀를 낸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갈 길목을 예상하고 그 주변에 있던 돌무화과 나무(뽕나무)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다. 순간 예수님께서 고개를 드시고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발견하신 후 그에게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삭개오와 함께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삭개오는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고 예수님 앞에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간 남에게 착취한 돈에 4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갚겠다고 선언한다.

참으로 한편의 동화와 같은 이 이야기의 진행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본문의 해석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들어와서인지 몰라도 삭개오라는 말만 들으면 키작고 탐욕스러운 모습의 한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인지 삭개오는 어느덧 우리의 기억 속에서 편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너무 쉽게 단정지어졌던 것 같다. 삭개오는 과연 그런 인물일까? 그에 대한 편견은 직업이 세리였다는 점이 큰 몫을 한다. 이는 성경에 세리들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 여리고에 살았던 사람들도 그의 직업이 세리라는 점에 주목하여 그를 판단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 하기 보단 스스로 판단하려는 데만 앞섰다. 예수님은 삭개오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의 진면목과 그가 얼마나 소중한 자인지를 밝히시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가야 할 점이다.

로마는 그야말로 납세의 국가였다. 오로지 납세자만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로마다. 단순한 시민의 계층적 계급 이외에서도 개인이 내는 세금에 따라 정부가 사람의 등급을 매겼다. 이것은 자치권을 부여한 속국에도 적용되었는데 속국은 로마에 정해진 세금을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로마에서 속국으로 파견된 관리들은 주로 세금 징수, 영토 방어, 공공질서 유지와 같이 로마와 이해관계가 맞물린 일에만 집중하였었다. 때문에 세금은 매우 엄격하게 거뒀다. 그것은 로마라는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자신이 내는 세금을 발판으로 지방정치나 제국의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노예나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착취하는 귀족들이 늘어나 하층민의 삶은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의 세금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우선 인두세가 있었는데 이것은 14세부터 65세까지의 남자와 12세부터 62세까지의 여자라면 누구나가 지불해야 하는 기본세였다. 그 다음은 토지세였는데 모든 곡물에는 10%를 부과하고 포도와 기름에는 5%를 부과하였다. 그 이외에도 수입의 1%를 부과하는 소득세가 있었다. 이런 세금들은 정해진 고정세였기 때문에 세리들이 속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온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이외의 부분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세금을 거두는데 현지사람들로 구성된 세금징수인을 고용하였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한 세금만 받으면 되었고 그 이외에 세리들이 얼마를 더 걷는지에 대해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세리의 착취가 만연했고 세리는 매우 부패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잡았다. 세리들은 때론 짐마차의 바퀴 숫자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였고 마차를 끄는 동물에도 세금을 메겼다. 때론 노상에서 보행자를 불러 세우고 그 짐을 풀게 한 후 그 속에 있는 내용물들에 대해서 세금을 부여하는 일을 빈번하게 저질렀다. 세금을 지불할 수 없는 경우엔 돈을 빌려주어서 세리가 고리대금업자를 겸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일반서민들이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땠을까?

세금이라는 것이 삶의 어려움을 가져오는 문제도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동시에 종교적인 갈등도 야기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다. 열심당원과 같은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친다는 것에 대하여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고 그런 생각들로 여론을 몰고 갔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민중을 현혹하였다. 예수님께 찾아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가한 것인지를 묻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려는 의도에서 말했던 것이다(마 22:17).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액수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로마의 앞잡이로 생각했다. 또한 세금 징수가 과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리들은 강도같은 존재들로 생각했다. 성경에서도 세리를 언급할 때 항상 세리 하나만을 언급하기 보다는 "세리와 죄인, 세리와 창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정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리들은 다 똑같아"라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특히 상대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그런 오류들을 저지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가보지 않은 채로 일본에 대한 선입견에 의해서 일본을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일본 사람들이 있으면 그에 대해 알려 하기보단 일본인이란 이유로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람 모두가 그렇지 않듯이 대부분의 일본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만 그들을 접해보면 알게 된다. 이처럼 단순화의 논리는 우리의 시각을 매우 왜곡시킨다. 삭개오도 그런 단순화의 오류에 의한 피해자였다. 그는 세리였지만 이제까지 보아온 세리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1. 삭개오는 의인이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는 그의 이름에 주목해야만 한다. 삭개오는 헬라어로 '작카이오스'로 히브리어 "자카이"라는 말의 음역에서 비롯된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자 중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스 2:9; 느 7:14). 그 이름의 뜻은 '순전한, 의로운'이다. 이 뜻을 가지고 2절을 다시 읽어보자.

"의로움이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세리장이었고 또한 부자였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의로움"이였는데 특이하게도 이 사람은 직업이 세리였고 또한 부자였다. 세리였기 때문에 착취를 일삼아 부자가 되었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의 기자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여리고에 한 세리장이 있었는데"라고 말하지 않고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라고 꼬집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2절의 표현은 이 본문 바로 전장인 눅 18:18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를 염두 한 표현이다. 거기서 등장하는 부자도 관리였고 삭개오도 관리였다. 18장에 등장하는 관리도 큰 부자였고 삭개오도 부자로 소개된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을 대비시키면서 그 둘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일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삭개오가 그 부자와는 다르게 의로운 사람임을 먼저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의 개념과는 다르게 삭개오의 성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정의와 관련이 깊은데 예를 들어 레 19:35, 3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5, 36)

성경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의의 개념은 '정당함, 공평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금을 거두는 직책은 돈을 다루는 직업으로 이런 거래의 척도가 매우 중요시되는 직업이다. 가장 쉽게 불의나 부당함이 나타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가장 공의를 요구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그가 "의로운" 세리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다른 세리들과는 다르게 의로운 자였다. 그는 착취하지 않았으며 정직하게 자신이 거두어야 할 세금을 정당하게 집행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악평이 퍼졌던 것은 로마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부정적인 선동 때문이었다.

크리스천에게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의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칭의가 너무나도 중요시되다 보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기본적인 의, 즉 정직과 올바름에 대한 개념들을 많이 잊고 살아간다. 믿는 순간 자신이 의인이라고 오해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돌아볼 기회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웬만한 잘못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의로운 삶의 정체성을 대부분 종교적인 면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부흥, 기도, 전도, 예배 등 여러 종교적 활동에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필사적이지 못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투명성, 도덕성이 사라져 온갖 세상의 질타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교리만을 중요시하는 정체성을 넘어서 신조와 삶의 모습이 일치된 모습으로 교회의 참된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 가운데 기본적인 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 안에서 정직과 올바름, 그리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관계를 실천해 나갈 때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밝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2. 그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갈망하던 자였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삭개오 스스로가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었다. 그는 여리고에서 매우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어디가 아파서 예수님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보고자 했을까?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 원했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잘 볼 수 없었다. 삭개오가 키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도 않았다. 좀처럼 접근할 수 없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 이동경로를 계산하여 그분이 지나가실 길목에 서있던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갔다.

여리고 돌무화과 나무(일명 삭개오의 뽕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원솜니 목사

그런데 이것은 당시의 문화에 비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 어른이 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치마를 입고 나무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본다면 보는 이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당시 유대인 남성의 의복도 일종의 원피스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체가 들여다보이는 경박한 행동을 삼갔다. 그래서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은 매우 품위가 없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랐단 것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주님을 보고자 그가 보인 행동은 그가 얼마나 주님을 간절히 보기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들려진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었고 권능의 사역들을 보고 싶었고 가르침의 말씀들을 듣고 싶었다. 그토록 갈망했기에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즐거움으로 자신의 집에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의 행동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이 어떤 뜻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눅 18:17).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이들은 포기란 것을 잘 모른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등이 있으면 떼를 써서라도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했을 때는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실제를 순수하게 믿는 것도 되지만 그 나라를 간절히 갈망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원했고 그분을 보기 위해선 자신의 위신이나 신분, 격식 등을 따지지 않았다. 비록 앞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과감히 나무 위를 올라갔다. 예수님은 마치 나다나엘을 아셨던 것처럼 삭개오를 아셨는데 이는 삭개오가 나다나엘처럼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주님을 향한 삭개오의 간절함이 있어야만 한다. 주님을 보기 위해 간절하게 주님을 찾고 구하는 일들이 사라진다면 결단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신다. 그분에게 다가서는 것은 화려함도 격식도 어떤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단지 그분을 보기 위한 간절함을 가지고 찾을 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와 만나주신다. 우리의 이름을 정확하게 호칭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집에 거하시겠다고까지 선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내 집에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거나 격식을 따지면서 주님을 찾는 일에 등한시 한다면 우리와 주님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론 주님을 찾는 일이 사회적으로 꺼려지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내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에서 예수쟁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큰 부담을 짊어지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순서가 잘 갖추어진 예식에서만 주님을 만나려 하고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주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수가 있다. 삶의 매 순간 순간에서 주님만을 찾으려는 신앙의 열심을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주님을 고상한 한도 내에만 만나려 한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선 삭개오와 같은 간절함이 필요하다. 아이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 다가서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간절하게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찾고 고백하고 그분을 드러내라. 간절히 찾는다면 반드시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 아직 자신이 주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만남을 어린아이처럼 그토록 간절히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삭개오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였다. 모인 무리에는 마을의 대표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마을에 들어온 손님을 정성껏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즐기시는 일정이 전개될 참이었다.

마을의 귀빈을 접견하는 장로들과 마을사람들   ©원솜니 목사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뒤로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삭개오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불쾌한 일이었고 모욕이었다. "어떻게 예수님은 저런 죄인과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율법도 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죄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수군거리며 불평들을 쏟아냈다. 여기서 수군거리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웅성웅성 댄 것이 아니다. 이는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같은 단어가 70인역에서는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를 대적해 원망하던 바로 그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그들은 삭개오에 대한 적개심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삭개오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주님 보십시요. 나의 있는 것들의 절반을 내가 가난한 자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자의 어떤 것을 내가 속여 강탈했다면 저는 그에게 네 배를 갚습니다"

헬라어의 현재형 시제는 주로 현재로 해석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미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8절의 말씀도 현재로 쓰여졌지만 성경본문은 미래형으로 번역이 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번역은 삭개오가 잘못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 새사람으로 변한다는 문맥에 의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법 그대로 현재형으로 해석하면 아주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된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항변하고 있다. 아니 자신을 항변한다기 보다 자신에 대한 오해가 이제 주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되자 자신의 삶을 주님 앞에 증거한다.

자신은 의롭게 행했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부자였지만 돈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수익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삭개오는 자신이 생활하고 남는 잉여의 부분을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만 힘쓰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다. 또한 다른 세리들처럼 남의 것을 강탈한 적도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율법의 적용대로 자신이 4배로 갚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출 22:1; 삼하 12:6). 세리라는 직업은 쉽게 남을 속여 빼앗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결코 돈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채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잘 감당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자일 수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는 어떻게 돈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나? 부자관리가 심히 근심하면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이야기하셨다. 이때 제자들이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마음을 바꾸게 한 사람은 가능하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부자관리와 부자 삭개오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름아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였다. 부자관리는 예수님께 나왔을 때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호칭하였다(18:18).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호칭을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이야기만을 하시는 선생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호칭하였다(8절).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으로 모신 것이다. 그가 율법에 순종하였던 것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한 것도 바로 자기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주님에 대한 인식이다. 선생님과 주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구속력이 없지만 주인의 말은 내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주로 고백한다면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말씀에 통제를 받고 그 말씀의 기준에 따른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에 바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무리 내게 많은 부와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인으로 자리잡는 순간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담력과 뜻이 생기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온전한 삶을 살았던 삭개오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의 삶을 살아왔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인정받는 인생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아가는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인가? 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인가?

무엇을 그토록 갈망하는가? 선생되신 예수인가? 주인되시는 예수인가?

삭개오와 같은 간절한 열망으로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찾고자 노력한다면 당장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요. 그때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인생이 될 것이다.

■ 원솜니 목사는...

칼빈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전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의 성지탐방을 인도하고 성경의 문화와 배경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평신도 전문신학기관인 갈렙바이블아카데미의 운영위원과 올리브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의 배경과 문화를 소개하는 올리브바이블스터디(www.olive.or.k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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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솜니목사 #여리고의삭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