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한국교회부활절 연합예배 공동설교문 전문]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의 아침입니다. 이 아침, 하 나님이 죽음을 죽이고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부활절 아침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의 전통을 따라 동일한 인사를 나눕시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첫 번

부활의 아침

처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그 새벽입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미명에 여인 셋이 조심 조심 예수님이 묻혀있는 돌무덤으로 접근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 그런데 그녀들의 표정이 밝지가 않습니다. 무덤을 찾는 사람치고 밝고 쾌활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 니까마는 십자가의 비참한 죽임을 당한 예수이고 보니 세 여인의 분위기는 더더욱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손에는 급히 마련한 향품이 들려져 있습니다. 당시 향품은 대개 향나무 껍질이나 향을 내는 풀을 가리켰고, 향유는 액체나 연고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향유를 바른 긴 천으로 시신을 감싸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 100근으로 처리가 된 상태이지만 향품은 그 속 성상 시간이 오래되면 향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마다 시신 곁에 두는 향품을 새것으로 교체해 주어야 합니다. 또 시신의 정상적인 부패를 위해서 정기적으로 시신에 향유를 발라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으면서 향품을 지참했다는 것은 그들이 무덤에 온 이유를 말해줍니다.

무덤을 살펴보기 위해서! 예수께서 잘 죽어있는가 보기 위해서! 시신이 정상적으로 잘 썩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래서 비싼 돈 들여 향품을 준비해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겁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부활의 첫 아침에 그 현장에 있던 여인들은 참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다는 설렘도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 부활의 현장을 찾은 그들이지만 부활의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것은 시신에 바를 향품과 예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슬픔, 그리고 거대한 돌문을 옮길 걱정뿐이었습니다. 그 아침 부활의 현장에는 죽음을 확인하는 슬픔만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이 여인들은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진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로 예수님이 온전케 해주신 여인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이자 자기 아들이 12 제자 중의 하나로 예수를 따르며 수종 들던 여인입니다.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내이자 예수님의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며 예수님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하나같이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내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떤 식으로든 못 들었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런 엄청난 기적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이 말씀이 지적하듯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이 인류 역사상 처음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었잖아요? 유대인들이라면 전설처럼 내려오는 죽은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부활을 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 황당한 것은 제자들이지요.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무덤을 찾은 일행 가운데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서만을 놓고 볼 때 8장 31절을 필두로 9장 31절, 10장 34절, 그리고 14장 28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 마다마다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죽은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목도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부활의 아침
에 예수의 무덤을 찾는 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의 부활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자들의 반응을 이리 전합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마가복음 16장 12절은 예수께서 다른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하는데, 이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가 살아나셨다 우리가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죽은 자의 부활이 비상식이고 몰상식이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비상식이란 부활을 못믿는 것이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먼저 거론하며 꾸짖으신 것이 제자들의 믿음 없음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왜 부활 현장을 수차례 목도한 제자들이 부활의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나요? 간단합니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을 이길 자는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키는 최후 승자다! 제자들도 여인들도 죽음이라는 숙명론에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첫 번 부활의 아침을 맞은 이들의 기대치는 부활이 아니라 잘 죽어있음, 죽음!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활절

여러분들 눈에는 이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우리 손에는 시신에 바를 향유 대신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우리 머리엔 무덤의 돌을 굴려낼 염려 대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이적의 현장에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아
침, 달랑 세 명의 여인들만 부활의 기대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은 화려한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니 갑자기 여러분이 거인이 된 느낌이신가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과 여인들의 불신앙적인 태도가 한심하게 보이시나요? 믿음 없는 사람들, 상식에 절은 사람들, 죽음을 마지막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 그들이 갑자기 불쌍해 보이시나요? 반대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같아 여러분 스스로에게 뿌듯하신가요?

어느 목사님이 부활주일 새벽 연합예배 순서를 맡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차가 고장이 나서 급히 택시를 탄 다음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이리 말합니다. "손님도 그 부활절 행사장에 가시네요. 오늘 새벽 벌써 그 행사 참석하시는 손님을 세분이나 모셨습니다. 새벽 일찍 고단하실 텐데 아직도 그 행사는 매년 하는가 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부활절 예배는 일종의 '행사'로 비쳐지고 있구나! 아직도 하는 행사!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관심도 없는데, 교인들끼리 모여서 갖는 행사! 여러분 이것이 선교 역사가 일천한 한국교회만의 사연일까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분이 전한 사연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주일 오전에는 독일교회에 출석하고 오후에는 한인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분이 출석하던 독일교회는 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는데, 평소 주일아침 9시 예배에 가는 길은 한산하기 그지없습니다. 교회는 크고 넓었지만 예배 참석자도 40-50명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부활주일 아침이었는데, 그날따라 이른 아침인데도 교회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이 걸어가더랍니다. '아, 부활주일이라 이 사람들이 모처럼 교회에 가는가 보구나.' 그런데 웬걸요. 교회 바로 앞 횡단보도에서 다들 길을 건너는 겁니다. 길 건너에는 '프리덴 호프'가 있는데, 다들 거기로 들어가는 겁니다. 프리덴 호프! 우리말로 하면 '평화의 동산'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공동묘지'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생명을 이야기하는 부활주일 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상징인 공동묘지로 가는 겁니다. 이미 생명이 끊겨 다시 흙으로 돌아간 그 자리, 주검이 누워있는 그 생명 없음의 현장을 생명의 날에 찾는다니요. 그것도 기독교국가라는 독일에서 말이지요. 부활주일 아침에 공동묘지를 찾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거기 갔겠습니까? '오늘이 부활절이니 죽었던 내 아내 죽었던 내 가족이 무덤을 열어젖히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거기 갔겠습니까? 독일인들에게 부활절은 우리로 치면 한식과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모처럼 무덤을 찾아서 관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서구의 사정 역시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 부활절 아침의 여인들이나 오늘 한반도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서구교회의 형편이나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부활이 특정한 집단의 행사처럼 되어 있는 것 말입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숙명에 사로잡혀 있는 것 말입니다.

그때 그리고 지금

아니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보다 우리가 나을 게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이야기이냐고요?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의 첫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의 심리를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여인들을 향해 "무서워 말라!" 라고 한 것을 보면 여인들이 천사의 등장에 엄청난 공포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 달려가는데 그 마음 상태를 '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님과 만났을 때도 그들의 마음은 '무서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두려움, 무서움, 큰 기쁨! 이 세 단어가 처음 부활 아침 현장에 있던 여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단어들입니다. 천사를 보았다! 무서운 일이지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

무서운 일이고 동시에 엄청나게 기쁜 일이지요.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아무리 예수라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내 눈앞에 있는데 무서운 게 당연하지요.

그리고 그 공포 속에서, 그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여인들은 이 소식을 전하러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이 땅에 등장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첫 번째 전령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고 슬픔에 잠겨있던 제자들은 이후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데 그들의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결코 감정의 요동침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려움에 떠신 분이 계셨나요?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처럼 너무 나도 기뻐서 거리로 뛰쳐나가셨나요? 수많은 설교자들이 부활절 설교를 작성하느라 수고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얼마나 부활의 감격에 휩싸여 있을까요? 설교를 작성하는 부담만 있지 두려움이나 기쁨과는 전혀 무관
하지 않나요?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우리 눈에도 천하에 한심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위해 온 생애를 바쳤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나요? 부활절 계란 삶는 것, 부활 헌금 드리는 것, 그래서 교회의 일 년 중 큰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는 행사 종료의 안도감이 부활절의 결산인가요?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부활절 새벽예배에 참석하셨을 겁니다.

부활,

그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접하고 여러분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그 부활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부활을 믿고 계시나요? 아마도 다들 그리 생각할 겁니다: '우리가 죽고 주님 재림하실 때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그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때 다시 부활할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우리가 생리적으로 죽고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그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은 생명체인 예수님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의가 의로움을 꺾었다는이야기입니다. 사탄의 왜곡된 힘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사랑의 역사를 박살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만일 죽음이 끝이라면 예수님의 생명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져온 사랑도 평화도 다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따라서 우리는 그냥 살면 됩니다.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서 살면 됩니다. 본능에 충실하면서 살면 됩니다. 죽임이 끝이라면 불의가 영원한 승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준 게 부활입니다. 죽음을 죽인 죽임이 부활입니다. 그 부활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여인들을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리게 만든 천사는 목성에 있었습니까? 삼층천에 있었습니까? 보십시오! 여인들이 찾아갔던 예수님의 무덤은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지요. 예수의 죽음은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시 부활이라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는 역사 밖이 아닌 역사 안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에게 다시 만나자고 명령하신 갈릴리는 우주 밖이 아닙니다. 영의 세계가 아닙니다. 바로 역사의 한 복판입니다.

사도행전 5 장 30-31 절을 보면 , 베드로는 대제사장에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쓰인 "임금"이라는 헬라어가 '아르케고스'(archegos)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선두주자", 또는 "개척자"라는 뜻입니 다. 특히 당시에는 배 안에서 가장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아르케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배가 해변에 거의 이르렀을 때 물결과 파도를 만나 안전하게 정박하기가 어려울 경우, 아르케고스는 밧줄을 자기 허리에 매고 물로 뛰어들어 거친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가 해변에 도착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밧줄을 바위나 나무에 붙들어 맵니다. 그래서 나머지 배에 탄 사람들은 그 밧줄을 붙잡고 무사히 해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금, 즉 아르케고스입니다. 그분은 죽음의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가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해변에 도착하여 밧줄을 고정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로 세 번째로 그분을 뒤따라가면 됩니다. 무엇을 따라가면 된다는 말인가요? 단순히 부활절 계란만 삶으면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가 뭡니까? 로마서 4장 25절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稱義)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를 위해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라는 베드로전서 1장 3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산 소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아르케고스인 주님을 따라 우리도 두 번째 세 번째 산소망을 전하는 아르케고스가 되어야지요 .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처럼 바로 이 역사 안에서 그 명령을 수행해야지요.

우리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많이 외쳐왔습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자!", "부활의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리자!"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이 슬로건대로 우리가 세상을 바꾸었나요?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렸나요? 과연 복음이 세상을 점령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점령했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증인을 내세우며 부활의 능력을 내세우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외쳐왔습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 봅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까? 부활의 감격도 부활의 기쁨도 없는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식을 들어도 전혀 무감각한데 그런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동안 너무 겉 넘었던 거 아닌가요? 길거리에 서서 자랑스럽게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을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운 신앙인의 상으로 손가락질 해왔습니다. 그리고 골방에 숨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던 세리를 참된 신앙인의 표상으로, 당연히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 델로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주소는 본받아야 할 세리가 아니라 정죄 받아야 할 바리새인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의인임을 주장하는 바리새인의 오답 위에 서 있지 않았던가요?

부활을 못 믿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보아 왔는데 정작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준 것이 무엇이 있나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인가요, 아니면 피로한 존재인가요? 우리는 스스로를 세상에 필요한 소금이라고 자임해 왔는데 세상은 우리를 건강에 해로운 백색가루로 꺼려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주님 부활 이후 2천년 동안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고 외쳐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여전히 널부러져 있는 주검들은 무엇인가요? 오늘날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전쟁과 살인, 강간과 사기, 온갖 부조리한 야합과 거짓말, 이념적인 대립과 인종 편견, 경제의 양극화와 환경오염! 이런 것들은 너무 큰 주제라서 기독교인과 무관한 영역인가요?

죽음이란 생리적인 죽음만 아니라 실존적인 죽음도 죽음입니다. 생명이 자기 기능을 못하면 그게 죽음입니다. 우리 안에 성도가 성도의 기능을 못합니다. 자녀와 부모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부부간을 이어주는 신뢰와 사랑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죽는, 세상 가치의 공동묘지가 교회인데, 오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입 발린 소리로 또 한해를 넘겨야 하는 것인가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19.4%를 기록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의 생명과도 같은 가치인데 세상은 교회와 성도를 못믿을 집단으로,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로 보더란 말입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강해설교자인 존 맥아더 목사는 오늘의 교회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교회는 이제 하찮은 곳으로 전락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목소리를 잃었다. 본질을 잃은 채 세상에만 받아들여지기 위한 몸짓이 오히려 교회를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무의미한 곳으로 만들었다." 맥아더 목사의 이야기처럼 세상이 우리를 무의미성으로 보는데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부활절만 되면 으레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을 용기로 보아야 할까요, 만용으로 보아야 할까요? 우리 역시 죽음을 살면서 주변을 살려야 한다고, 살릴 수 있다고 교만했던 것은 아닌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오늘 부활의 아침을 맞는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참회입니다. 진정 부활의 기쁨을 맛보려면 , 진정 부활의 능력을 얻으려면 , 진정 부활의 사도들이 되려면 먼저 주님 앞에 참회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 보십시오. 이스라엘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의 순간에 요엘 선지자는 '주님의 날'을 선포하며 전 국가적인 회개를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는 진심어린 회개가 있을 때 진정한 구원, 새 생명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한데 그 믿음은 우리의 죄를 주 앞에 토설하는 참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되돌아온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허물과 배신을 책망하기는 커녕 손수 아침을 차려 주시며 기쁨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 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바로 그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역사를 훑어 올라가면 아주 특이한 순서를 아주 오랫동안 지켜왔습니다. 소위 '키리에' 라는 것인데요. 그리스어인 키리에의 원래 명칭은 '키리에 엘레이손'으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혹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시작할 때 찬송 형식의 이런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거든요! 주님 이름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에 키리에 엘레이손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생명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백과 기도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스스로 의인임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바리새인의 탈을 벗고 골방으로 들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죄인임을 자복하던 세리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제는 다 내려놓읍시다. 공갈빵처럼 능력도 없이 허풍만 떨던 부활의 증인 타령 그만하십시다. 그리고 참회의 눈물로 부활의 주님 앞에 무릎 꿇읍시다. 주여, 우리 안에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없나이다. 주여,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없나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외쳐왔고, 할 수 있다고 입으로만 떠벌려왔나이다. 이 가식과 거짓 그리고 형식화된 신앙 안에 생명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생명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서움과 두려움과 큰 기쁨에 전율했던 여인들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무서움과 두려움과 큰 기쁨에 전율하게 하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던 믿음 없음에서 출발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처럼, 회개의 심령에 부어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부활의 증언자가 되어 사방에 깔린 죽음의 세계에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시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게 하옵소서! 주의 몸된 교회와 주께서 피로 사신 성도들이 부활의 기쁨과 환희, 부활의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활신앙의 희망 안에서 모든 죽음의 세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생명의 청지기들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리심이 교회와 가정, 사회와 국가, 그리고 동토의 땅 북녘에 임하시도록 간구하는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부활절 #연합예배 #공동설교문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