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다 알거
완다 알거.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완다 알거의 기고글인 ‘하나님은 당신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하고 계신다'(God isn't punishing you. He's pruning you.)를 10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완다는 35년 넘게 예배 인도자, 교사, 저자, 치유·상담 사역자, 강연자로 섬겨 왔다. 아홉 권의 책을 집필한 저자로서,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통해 성숙해 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인 가지치기가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신자가 지치고 실망하며 앞으로 닥칠 일을 불안해한다. 세상의 혼란과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예기치 않은 변화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상실과 혼돈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의 상황처럼 느껴진다면,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어진 변화와 적응의 과정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이러한 흔들림은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라는 초대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치유하시며 다음 걸음을 준비시키도록 맡기는 것이다. 성경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고 말한다.

그러나 가지치기는 때로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하나님께서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다루실 때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히 아는 것들은 비교적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죄와 이기심,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명백한 장애물을 다루시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을 따르는 일이 소중하고 좋은 것까지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중한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아야 할 대상은 소중히 여겨온 관계나 오랫동안 품어온 기대일 수 있다. 소속감을 주었던 공동체, 삶의 목적을 부여했던 역할, 확고하게 정해졌다고 믿었던 미래의 계획일 수도 있다. 때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은 그분께서 요구하시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까지 기꺼이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와 하나 되는 삶에는 거짓에서 벗어나 진리에 따라 변화되는 거룩함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그 진리가 자신이 몹시 사랑하는 무언가를 가로막기 시작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일을 삶에 무언가를 더해주는 경험으로 생각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눈이 열리며, 이전보다 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때로 우리가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게 하기도 한다. 성급한 전제를 드러내고, 차라리 모르고 싶었던 상황의 이면을 보여주며,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숨겨진 동기를 드러내고, 미래의 토대로 삼았던 기대를 흔들기도 한다.

진리를 마주한 뒤에는 선택해야 한다.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따를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은 추상적인 신앙의 이상을 넘어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내려놓아야 할 것과 정리해야 할 관계, 접어야 할 기대가 생길 수 있다.

연합을 위한 기도 뒤에 찾아온 혼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데 드는 대가를 헤아리라고 가르치셨다. 그 길에 희생과 상실이 없으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주님께 충성하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진리를 따르다가 관계와 평판, 안락함과 안전을 잃을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친히 걸으셨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고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이어 제자들과 함께 동산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의 배신으로 체포되셨다. 연합을 위한 기도 직후 제자 공동체가 흩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유다는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이 아니었다. 제자들과 함께 걷고 식사하며 여행했고, 예수님의 사역과 기적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이제 그의 마음과 선택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제자들에게 충격과 고통을 안겼다. 스승은 체포됐고 동료는 배신자가 됐다. 베드로는 칼을 빼 들었지만 이후 예수님을 안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 다른 제자들도 두려움 속에 흩어졌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익숙했던 삶의 토대가 흔들렸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뜻을 이루셨고, 제자들을 새롭게 빚어가셨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혼란과 상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었다.

진리 위에 세워지는 연합

고난 한가운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상황과 연결한다. 관계가 회복되고 기회의 문이 열리며, 계획이 성공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모습을 기대한다. 물론 하나님은 화해와 연합을 기뻐하신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러나 성경적인 연합은 문제가 없는 척하는 태도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그 기초는 진리다. 때로 하나님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시기에 앞서 더 이상 그대로 유지할 수 없는 문제를 드러내신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운 상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바로 그때 진리를 향한 사랑이 시험받는다.

하나님의 관점을 원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관점이 자신의 생각을 뒤집을 때에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뜻이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포기하도록 요구할 때, 우리의 고백은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받는다.

때로 우리는 내려놓지 않으려는 고집을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대로 무너지게 두실 리 없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상황이 역전되리라고 확신한다. 손을 놓는 것이 곧 신앙을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져 끝까지 움켜쥔다. 그러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신실함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하고, 하나님께 그 모습대로 일하시기를 요구하던 태도를 내려놓는 일이다.

가지치기는 더 많은 열매를 위한 과정이다

성경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요 8:32). 그러나 그 자유는 때로 거짓된 것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마음의 할례처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에 함께 가져갈 수 없는 것을 잘라내는 과정이다. 그 일은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과정이라고 믿더라도 아픔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열매 맺는 가지를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5:2). 따라서 가지치기가 반드시 잘못에 대한 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열매를 맺는 가지도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해 다듬어진다. 이러한 말씀은 상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놓는다.

어떤 시기에 적합했던 일이 다음 시기에도 반드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던 관계나 역할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한때 믿음을 북돋웠던 기대가 어느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대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을 내어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나아갈지를 아버지께 맡기는 일이다.

그렇다고 관계를 가볍게 저버리거나 모든 어려움을 성급히 ‘하나님의 가지치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불편해졌다는 이유만으로 헌신과 약속을 버려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은 인내와 용서, 화해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요구한다. 동시에 상실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고집스럽게 붙들어서도 안 된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빈자리를 보기 전에 먼저 신뢰해야 한다

제자들은 마침내 그날 밤의 비극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알게 됐다. 십자가 이후에는 부활이 있었다. 무너진 기대 너머에서 그들은 이전보다 더 깊이 예수님을 알게 됐다. 유다의 배신과 공동체의 혼란 이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졌고,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열방을 향해 보냄받았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그 미래를 볼 수 없었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걸어야 했다. 이것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이 요구하는 깊고도 고통스러운 대가다. 하나님께서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실지 알기 전에 먼저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충분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앞날을 모두 보여주시기에 앞서 신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반드시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리라는 보장을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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