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조너선 티센의 기고글인 "포로 된 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샬롬’의 방향성"(The exile example reveals shalom in every direction)을 5월 2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조너선 티센은 강연자이자 벤처 빌더, 그리고 스캐터(Scatter)의 공동 설립자로, 약 14년간 옛 소련 지역에서 사역하며 세계 75개국을 경험했다. 그는 신앙과 일의 통합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왔으며, 최근에는 ‘구속적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여러 스타트업을 공동 설립했다. 또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통합된 삶이 이웃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개념은 익숙한 몇 가지 범주, 즉 교회 사역, 전도, 제자 훈련, 영혼 구원 등으로 축소되어 왔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교를 향한 성경적 비전은 그보다 훨씬 더 장대하다.
성경은 영원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갱신에 관심을 두시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그분은 분명 사람들을 돌보시지만, 동시에 장소, 시스템, 노동(직업), 문화, 그리고 지역 사회의 번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분의 구속 사역과 목적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뻗어 있다.
이러한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느헤미야의 이야기다. 느헤미야 2장에서 그는 아닥사스다 왕 앞에 서서 놀라운 요청을 한다. 반역의 역사를 지닌 도시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구하며, 심지어 왕에게 그 일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겉보기에 이 요청은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하며 터무니없어 보인다. 제국의 통치에 저항했던 이방 도시를 재건하는 데 페르시아의 왕이 굳이 자금을 지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해답은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더 큰 문맥 속에 놓을 때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에스더의 뒤를 잇고, 에스더의 이야기는 다니엘의 뒤를 잇는다. 이 포로기 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일관된 패턴을 보여준다.
포로 생활 중 이스라엘은 깊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했다. 고국에서 쫓겨나 자신들을 정의해 주던 모든 구조로부터 단절된 채, 그들은 이교도 제국 속에서 어떻게 신실함을 지키며 살 수 있을지 질문해야만 했다. 언뜻 보기에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듯했다. 하나는 반란을 통한 '저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화를 통한 '타협'이었다. 바벨론과 싸우거나, 아니면 바벨론이 되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제3의 길'을 제시하셨다. 그분은 포로들에게 정착하여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그들이 보내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성읍의 평안 속에 그들 자신의 평안이 있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9장). 이 지침의 중심에 있는 단어는 바로 '샬롬(shalom)'이다. 이는 평화, 온전함, 번영, 정의, 그리고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생명력 넘치는 삶을 아우르는 풍성하고도 확장된 비전이다.
예레미야의 지침은 놀라웠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에서 도피해서도 안 되었고,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려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쫓겨난 바로 그 척박한 자리에서 번영을 일구는 주역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속해있는 도시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했다.
다니엘, 에스더, 느헤미야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모습이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의 체제 안에서 정직하게 섬긴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지혜와 용기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한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 되는데, 이는 엄청난 신뢰와 영향력을 요하는 자리였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재건을 요청할 때쯤, 그는 아무런 배경이 없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제국의 유익을 위해 이미 삶으로 신실함과 유능함, 그리고 헌신을 증명해 낸 사람이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은혜를 얻었사오면"(느헤미야 2:5)이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왕의 일시적인 기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입증된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왕이 보기에 어둠 속에 숨겨진 위협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방 땅에서 샬롬의 씨앗을 뿌렸고, 이제 그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포로기의 패턴은 훨씬 더 먼 과거, 즉 창세기의 첫 장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는 거룩한 임무가 주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그곳에 두어졌다. 그들은 창조 세계의 선함을 발전시키고, 관리하며, 보호하고, 확장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아름다움, 평화, 풍요로움, 그리고 정의를 가져옴으로써 그분의 질서 있고 생명을 주는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지음받았다.
그 목적은 타락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고, 포로 생활 중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벨론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에덴동산의 백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들의 물리적 위치는 변했을지 모르나, 그들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가정을 꾸리고, 생명을 돌보며, 샬롬의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반영하도록 지음받은 존재들이었다.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분법(sacred/secular divide)이 그토록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은 무의식적으로 두 가지 범주로 나뉘어 왔다. 어떤 것들은 거룩한 것, 즉 교회 일, 기도, 자선, 선교로 여겨진다. 반면 비즈니스, 투자, 엔지니어링, 디자인, 양육, 농업, 혹은 시민사회의 리더십 같은 것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가장 영적인 공헌은 명백히 종교적인 환경에서만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며, 일상적인 노동은 부차적이거나 영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나누지 않는다. 성경은 삶의 일부만 하나님께 속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땅과 그 안에 충만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은 그분의 통치 아래 존재하기에 모든 삶이 곧 영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구분은 '성과 속(sacred vs. secular)'이 아니라 '빛과 어둠(light vs. darkness)'이다.
삶의 모든 영역은 이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향할 수 있다. 교회 지도자의 역할이라 할지라도 통제나 허영, 조작으로 얼룩져 있다면 어둠에 기여하는 것이다. 반면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역할이라도 진리, 정의, 창의성, 섬김, 그리고 치유를 특징으로 한다면 빛에 기여할 수 있다.
질문은 '그 직업이 충분히 종교적으로 보이는가'가 아니다. 핵심은 '그 일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에 동참하고 있는가'이다.
성경의 언어에서 빛은 모호하고 희미한 영적 후광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혼돈을 몰아내는 질서이며, 거짓을 물리치는 진리요, 분열을 넘어선 온전함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질서를 부여하신 삶의 결과가 바로 '샬롬'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과 노동의 의미를 완전히 재구성한다.
너무나 자주, 일(직업)은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취급되어 왔다. 때로는 이른바 '진짜 사역'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때로는 신뢰를 얻기 위한 발판으로 여겨진다. 혹은 더 영적인 부르심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적 수단으로서 마지못해 용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 비전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깊다. 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눈부신 표현이 될 수 있다.
진리, 정의, 창의성, 섬김, 그리고 사랑으로 행할 때, 우리의 일은 세상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일은 샬롬이 지역 사회와 제도, 그리고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터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시키며, 망가진 시스템을 치유한다. 가정을 돌보고, 신뢰를 쌓으며, 가식 없이 그리스도의 임재가 드러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연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교회가 '소명(부르심)'을 너무 좁게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것은 때때로 공식적인 사역이나 해외 선교를 위해 구별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넓은 지평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본래 창조된 목적과 삶의 자리에서 멀어지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의 은사, 소망, 역량, 그리고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에 동참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내가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가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훨씬 더 나은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무엇을 들려 주셨는가?", "그분이 당신을 어떤 모습으로 빚으셨는가?", "무엇이 당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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