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Unsplash/Anthony Choren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프랑스 상원이 조력사망 허용 법안을 부결시키면서 프랑스 사회에서 안락사와 생명윤리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고 5월 15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현지 기독교 단체들과 생명운동 진영은 상원의 결정을 환영하며, 향후 하원 재심의 과정에서도 같은 결론이 유지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랑스 상원은 지난 11일 ‘생애말기법(End of Life bill)’ 2차 심의를 진행한 끝에 논란이 됐던 조력사망 법안을 부결시켰다. 해당 법안은 앞서 올해 2월 프랑스 하원인 국민의회에서 통과된 바 있다.

이번 법안은 말기 환자가 조력사망을 요청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법안 17조에 포함된 ‘방해 행위’ 조항이 거센 논란을 불러왔다.

해당 조항은 환자가 조력사망 관련 정보에 접근하거나 조력사망 절차를 진행하는 것을 막았다고 판단될 경우 최대 징역 2년과 3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프랑스 보수 정당 공화당(Les Républicains)의 대표이자 2027년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브뤼노 르타이요 의원은 상원 토론 과정에서 법안에 강하게 반대했다.

르타이요 의원은 “이번 문제는 단순한 의료윤리 조정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의 근간을 바꾸는 중대한 변화”라며 “국가가 죽음을 하나의 권리처럼 제도화하기 시작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문이 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프랑스 의료체계가 이미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조력사망 제도가 경제적 논리와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르타이요 의원은 “우리는 병원과 돌봄 시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완화의료 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지로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정한 존엄성은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돌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기독교계 “완화의료 확대가 우선”

프랑스 복음주의 진영 역시 상원의 결정을 환영했다. 프랑스복음주의협의회(CNEF) 산하 단체인 인간존엄복음주의개신교위원회(CPDH)의 프랑크 메이어 대표는 성명을 통해 “상원이 완화의료 확대와 접근성 개선을 위한 별도 법안을 채택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어 대표는 조력사망 법안이 다시 국민의회로 돌아가 3차 심의를 앞두고 있는 만큼 기독교 단체들과 생명운동 진영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불필요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며 위험한 이 법안이 완전히 폐기되기를 바란다”며 “생명을 존중하는 시민들이 낙담하지 말고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CPDH를 비롯해 제롬 르준 재단, 얼라이언스 비타, 가톨릭가족협회(AFC), 장애인기독교지원재단(OCH) 등이 안락사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메이어 대표는 특히 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의 양심 문제를 강조했다. 그는 “많은 의료인과 돌봄 종사자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직업을 선택했다”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의료인들 상당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통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의도적으로 죽음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의료 윤리가 조력사망 제도 도입으로 흔들릴 수 있다”며 “이번 법안은 의료 사명을 비인간적으로 바꾸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목회 상담도 처벌 가능성”…종교 자유 우려 확산

프랑스복음주의협의회(CNEF)는 지난해 해당 법안이 처음 하원을 통과했을 당시에도 국회의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강하게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당시 CNEF는 “국가는 조력사망 제도보다 완화의료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어떤 상태와 약함 속에서도 존엄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특히 기독교계는 이번 법안이 종교 상담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복음주의 단체들은 목회자나 기독교 의사들이 환자에게 조력사망에 대한 윤리적 반대 의견을 설명할 경우 ‘도덕적 압박’을 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의사 개인에게는 양심적 거부권 조항을 일부 인정했지만, 종교기관 자체에 대한 보호 조항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는 종교 기반 요양시설과 병원, 의료기관 등이 향후 법적으로 조력사망 절차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프랑스 기독교계는 이번 법안이 개인의 양심뿐 아니라 종교기관의 정체성과 운영 원칙까지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회 재심의 앞두고 논쟁 계속

조력사망 법안은 다음 달 다시 국민의회에서 재심의될 예정이며, 프랑스 사회의 생명윤리 논쟁도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목소리와 함께, 국가가 죽음을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데 따른 윤리적 우려 역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특히 종교계와 의료계 일부에서는 완화의료 체계 강화 없이 조력사망 제도가 먼저 도입될 경우 사회적 약자와 고령층, 중증 환자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 조력사망 제도 도입을 지지하는 측은 환자 개인의 선택권과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존엄한 결정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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