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에슬러
테드 에슬러. ©moodypublishers.com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테드 에슬러의 기고글인 ‘문명의 성문 앞에 다시 선 야만인들, 선교가 문명을 구할 것인가’(Barbarians are at the literary gates once more and missionaries may yet save civilization)를 최근 게재했다.

테드 에슬러는 선교단체와 교회 수백 곳을 대표하는 선교 네트워크인 Missio Nexus의 대표이다. 그는 컴퓨터 산업 분야에서 일한 후, 1990년대 발칸 지역에서 사역했다. 이후 선교단체 Pioneers에서 다양한 리더십 역할을 맡았으며, 2015년 Missio Nexus 대표로 임명됐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 선교사들과 수도사들이 인류 문명에 남긴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문해력의 확산이다. 선교가 전해진 곳마다 성경이 함께 들어갔고,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글을 읽도록 가르쳤다.

실제로 읽고 쓰는 능력은 선교의 핵심 토대 가운데 하나였다. 성경 번역은 대개 읽기 교육과 함께 진행됐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람들이 스스로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교육 운동이었다.

문자가 없던 언어에 문자를 만들어낸 일 역시 선교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이는 성경 번역과 긴밀히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존하는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많은 교육기관과 교육 시스템 역시 선교사들의 헌신 위에 세워졌다. 인도와 중국,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 일본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근대 교육 체계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기여는 매우 컸다.

초기 인쇄문화 발전에도 성경 출판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인쇄된 책이다.

과장이 아니라 현대 세계는 상당 부분 ‘읽기를 가르친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높은 수준의 문해력은 지적 탐구의 거의 모든 분야를 풍성하게 했고, 어떤 영역은 그것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얻은 유산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문해력 저하는 분명한 현실이 되고 있다. 종이와 활자보다 화면과 이미지가 주된 소통 수단이 됐고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관련 자료들을 보면 기준은 다르지만 흐름은 분명하다. 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능숙한 독해 수준에 이르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의 ‘숙련된 읽기’라는 기준은 과거 세대의 문해 기준과 비교하면 낮아진 수준이다.

이것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문명적 위기일 수 있다.

교회는 이전에도 했고 다시 할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홈스쿨링 운동과 고전교육 운동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이 움직임의 중심에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게 서 있다. 복음주의가 제도나 제도적 리더십을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교육 대안 영역에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다만 오늘의 읽기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두 방향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는 디지털 도구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스크린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야 한다. 인간의 번영을 위해 가장 좋은 활용 방식을 찾아야 한다. 디지털 노출에 대한 절제, 화면이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 아이들의 정서적·인지적 발달 단계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는 고전적 독서로 더욱 깊이 돌아가는 것이다. 긴 호흡의 글을 읽는 훈련, 곧 책 읽기다. 치밀한 논리와 긴 주장을 따라가며 사고 구조를 세우게 하는 책들, 공감과 감수성을 길러주는 소설들, 역사와 실패와 승리를 배우게 하는 전기들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성경은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성경 이해 없이 서구 문명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와 문화의 핵심 비유들은 성경 저자들의 기록에서 나왔다.

또 다른 선교적 순간이 오고 있는가

앞으로 몇 년 안에 인공지능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상상하지 않는 것들이 곧 평범한 일이 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것도 천천히가 아니라 전격적으로 말이다.

읽기와 문해력에 대한 개념도 이미 달라지고 있다. 몇 초 만에 요약이 가능한 시대에 왜 긴 책을 읽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조차 긴 글을 읽기보다 질문 몇 개를 던져 답을 얻고 싶은 유혹과 싸운다. 물론 어떤 경우 화면은 종이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많은 이들이 깊이 있는 글과 만날 기회를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이런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이른바 암흑시대가 시작됐을 때 유럽의 고전 지식은 소멸 위기에 놓였다. 침략과 제도의 붕괴로 지적 유산 자체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때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아일랜드는 지식 보존의 피난처가 됐다. 아일랜드 수도사들과 필경사들은 기독교 문헌뿐 아니라 고대 철학자들의 고전까지 필사했다. 수도원은 읽기와 학문, 예술의 중심지가 됐다.

대표적 유산이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Dublin)에 보존된 켈스의 서(Book of Kells)다. 이 수도사들은 서구 문학과 철학, 신학의 핵심 유산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아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실과 맞먹는 지적 재앙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역사가 토마스 케이힐(Thomas Cahill)은 그의 저서인 아일랜드가 문명을 구한 이야기(How the Irish Saved Civilization)에서 이를 자세히 다룬다.

오늘의 수도사들은 누구인가

이번에는 실제 책장이 불타는 방식으로 위기가 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어떻게 읽는가가 흔들리고 있다. 긴 글 대신 요약본을 읽고, 종이 대신 휴대전화 화면으로 읽고, 스스로 선택한 책 대신 인공지능이 골라주는 정보 흐름이 영혼의 양식을 대신할 수 있다.

위험은 책의 소멸이 아니라 독서 문화의 붕괴다. 그래서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 문해력과 깊은 읽기를 지켜낼 ‘현대의 수도사들’은 누구인가?"

어쩌면 그 부르심은 다시 교회와 선교 공동체 앞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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