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생을 묻고, 예수를 놓치다
본문
마가복음 10장 17–22절
서론
오늘 본문은 매우 강렬한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그는 걸어온 것이 아니라 달려왔고, 단순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체면을 내려놓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섰으며, 진리를 붙들기 위해 자신을 낮춘 사람입니다.
그는 진지했고,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결코 가벼운 질문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질문이며,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집중하지만, 성경은 어디로 가는가를 더 중요하게 묻습니다. 이 청년은 이미 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역설적인 결론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준비된 것처럼 보였던 사람, 이렇게 진지하게 질문했던 사람이 결국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문은 옳았지만, 방향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영생을 얻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누구를 따를 것인가”로 답하십니다. 신앙은 무엇을 더 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연결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생은 성취가 아니라 관계이며, 쌓아가는 결과가 아니라 붙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본론
Ⅰ. 영생을 향한 진지한 질문 (막 10:17)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청년의 내면 상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이 행동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내면의 긴박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며, 진리를 향한 결단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보다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의 위치보다 답을 찾는 것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생을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이미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하나님 없이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바로 그 공허를 인식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인생의 유한성을 인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생’이라는 질문은 단순한 종교적 호기심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고민하는 질문입니다. 시편 90편 12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날이 한정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묻게 됩니다. 그는 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종교적 한계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패한 신앙인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행동은 있었지만 생명이 없었고, 종교는 있었지만 관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존재 안에서 그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생명의 실체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감합니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저분 안에 있다.” 이 확신이 그를 달려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인간의 근본적인 착각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생을 행위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생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Ⅱ. 계명은 지켰으나, 중심은 비어 있었다 (막 10:18–20)
예수님은 이 청년의 질문에 대해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계명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 점검이 아니라, 그의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된 질문입니다.
이 청년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십니다.
그 결과 드러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지만 중심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죄를 피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계명을 지켰지만 하나님을 붙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바르게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예수님은 바로 그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은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고, 재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명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또 다른 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 역시 자신의 삶의 중심에 분명한 것을 붙들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그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의 생계였고, 미래였으며,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물은 그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었고,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장해 주는 기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은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급진적인 결단입니다. 그는 생계를 내려놓았고, 미래를 내려놓았으며, 자신의 정체성까지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를 선택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을 함께 보십시오.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만났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자 청년도 계명을 알고 있었고, 베드로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자 청년도 진지했고, 베드로 역시 동일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붙들고 떠났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차이는 성격의 차이도 아니고, 환경의 차이도 아니며, 도덕 수준의 차이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중심의 차이입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도 붙들고 자신의 것을 함께 붙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 6:24). 반면 베드로는 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결국 신앙의 본질적 갈림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붙들고 있느냐이며,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입니다.
Ⅲ. 예수님의 사랑과 결정적 요구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 한 문장은 짧지만 복음의 중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조건을 보시고 판단하여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온전히 아시고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지함을 아셨고, 그의 갈급함을 아셨으며, 동시에 그의 한계도 정확히 보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칭찬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의 중심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조금 더 보완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향한 진단이며, 그의 존재 구조를 향한 선언입니다. 문제는 행동 하나가 아니라,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중심에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의 삶을 붙들고 있는 주인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가장 숨기고 싶었고, 가장 내려놓기 어려웠던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찌르십니다. “네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의 핵심은 재산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재산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이 청년의 중심을 겨냥한, 매우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산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상태를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로 정리됩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선행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전환이었습니다. 중심의 전환이며, 주인의 전환이고, 삶의 방향의 전환입니다. 신앙은 무엇을 덧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것 위에 하나님을 하나 더 얹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의 구조 자체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중심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며,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그다음에 따라야 합니다. 이 순서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내려놓지 않으면 따를 수 없고,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예수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사건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약속이었고, 미래였으며, 그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중심을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이삭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인지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자 청년도 동일한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 지점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반드시 요구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대로 두지만, 사랑하면 반드시 건드리십니다. 사랑하면 바꾸기를 원하시고, 사랑하면 중심을 흔드십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결코 방치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변화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히 한 청년에게 주어진 요구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선택하라고 부르십니다.
Ⅳ. 슬픈 결말과 불가능의 선언 (막 10:22–27)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 장면은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무거운 긴장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는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거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싫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존중했고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 ‘근심’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기쁨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미련 속에서 돌아갔습니다. 진리를 알았지만 선택하지 못한 사람의 내면 상태가 바로 이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예수를 몰라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내려놓지 못해서 떠납니다.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며, 이해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결단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경제적인 경고가 아닙니다. 재물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람에게 착각을 만들어 냅니다. “나는 괜찮다”, “나는 부족하지 않다”, “나는 준비되어 있다”는 자기 충족의 감각을 주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를 넘어 하나님을 대체하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더 강하게 선언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은 과장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으로 ‘불가능’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낙타는 그 시대에 가장 큰 짐승이고, 바늘귀는 가장 작은 구멍입니다. 이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이 만나는 불가능한 조합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자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조차 들어갈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는 절망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기준을 무너뜨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 선언 속에서 복음이 드러납니다.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합니다. 구원은 내가 해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청년은 영생을 원했지만 예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들었으나 따르지 않았고, 답을 알았으나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선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모르지 않으며, 신앙의 언어에도 익숙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어떤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재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지만, 자존심이나 관계, 혹은 삶의 안전과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붙들고 있는 한,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초청입니다. 결국 신앙은 무엇을 더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고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영생은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예수를 따를 때 완성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주님보다 앞선 것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영생을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결단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주님만 붙드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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