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모르는 것일까, 외면하는 것일까?
본문
로마서 1장 18–23절
서론
사람은 책임의 자리에 서게 되면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몰랐습니다.” 이 말은 실수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고, 죄 앞에서는 가장 손쉬운 도피처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죄를 단 한 번도 ‘무지’라는 이유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로마서는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무죄하다는 책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선언하는 서신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죄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알 만한 증거를 이미 받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고발합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외면이었고,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태도의 거부였습니다.
로마서 1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인간 타락의 시작은 도덕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식과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단 위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을 동일한 심판의 자리로 불러내며, 동시에 오직 복음만이 살길임을 선포합니다.
본론
1. 복음은 선택지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붙들 진리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주저함 없는 선언으로 서신의 문을 엽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이 고백은 단순한 신앙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이미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통과한 한 사도의 결단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생명이었고, 타협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하며, 복음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임을 분명히 합니다(롬 1:16).
그래서 복음은 의견이나 종교적 취향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삶의 한 부분에 덧붙일 수 있는 장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으나,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18).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가릅니다.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걸림돌이 되며, 그 사이에 중립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복음 이해는 바울의 삶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행 20:24). 바울은 복음을 ‘설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증언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복음이 이론이 아니라 삶을 통과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복음에는 채찍의 흔적과 감옥의 어둠, 수없는 위협과 눈물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 삶 속에서 복음을 살아냈습니다(고후 4:8–9).
이처럼 복음은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삶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로만 두려 합니다. 주일에는 복음을 붙들지만, 삶의 결정과 가치 판단의 자리에서는 복음을 한 발 뒤로 물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방식의 신앙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말씀하시며, 복음을 선택사항이 아니라 삶의 중심으로 모시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며, 십자가는 장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며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6:25). 복음은 덜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전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믿음은 고백에서 시작되지만, 따름은 삶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중립도, 유보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마 12:30), 히브리서 기자 역시 “어찌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피하겠느냐”(히 2:3)고 묻습니다. 복음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부정한다고 약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복음을 등진 사람만이 생명의 길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결국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고전 4:20), 그 능력은 지금도 복음을 붙드는 자들의 삶 속에서 역사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이를 알고 있으며, 자신이 의탁한 것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실 줄 확신한다고 고백합니다(딤후 1:12). 이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생명을 걸고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한가운데서도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어디까지 나를 따르겠느냐?”
2. 멸망의 원인은 ‘지식 부족’이 아니라 ‘지식의 거부’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담아 단호하게 외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호 4:6).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멸망을 단순한 무지나 이해 부족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 없음’은 정보를 알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도적으로 밀어낸 태도, 곧 알기를 거부한 선택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언제나 관계적 개념입니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말하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된 지식은 결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지적한 멸망의 원인은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제거한 결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는 상태가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롬 1:21).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영적 현실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떠나 스스로 웅덩이를 판즉 터진 웅덩이라”(렘 2:13).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물을 담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붙들고 목말라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전혀 몰라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보다 당장의 유익과 욕망을 더 붙들었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다른 것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택의 비극을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붙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결국 멸망의 원인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린 의도적인 거부가 인간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몰라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을 더 붙들고 있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3.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셨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고 말하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신 분이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충분한 흔적을 남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음을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 19:1)고 고백하며, 말 없는 창조 세계 자체가 창조주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눈을 열어 바라보기만 해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세상이 설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전도서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갈망을 두셨습니다(전 3:11). 이 영원에 대한 갈증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인간 존재의 내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유한함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며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인식 가능하도록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보여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불신앙을 인식의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 14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지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영적 판단의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받아들이기 싫어서 내리는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 양심과 질서를 통해 하나님을 알 만한 충분한 증거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로 선택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몰랐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기를 원하지 않았고,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충분히 드러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기를 주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제 남은 문제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4.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는 죄
로마서 1장 21절은 인간 타락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이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태도의 왜곡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 이것이 성경이 경고하는 가장 위험한 영적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 삶의 결정과 우선순위에서는 하나님이 밀려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중적 신앙을 단호히 거부하시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특별한 업적이나 종교적 성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삶의 중심과 방향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태도임을 분명히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죄는 감사의 상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과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함께 언급하는데, 이는 감사가 하나님 중심 신앙의 핵심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며, 감사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합니다.
감사가 사라진 신앙은 이미 중심이 이동한 신앙입니다. 이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도 반복된 죄는 우상숭배 이전에 원망과 불평이었으며, 시편은 이를 “여호와께 감사하지 아니하며 그의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지 아니한 것”(시 106:7)으로 진단합니다. 감사의 상실은 곧 하나님 망각으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감사하지 않는 자들의 생각은 허망해지고, 마음은 어두워진다고 합니다(롬 1:21). 이는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분별력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판단대에 세우는 교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이 위험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3:7)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혜, 감사 없는 신앙은 결국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길로 향합니다. 로마서 1장이 보여 주는 타락의 흐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순간, 인간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알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인지, 그리고 우리의 삶과 입술에는 여전히 감사가 흐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단순한 고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영화롭게 하고 감사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회복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삶의 태도로 이어질 때, 신앙은 다시 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결론
로마서 1장은 인간의 죄를 무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하지 않고,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으며 감사하지도 않았다고 고발합니다.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태도의 왜곡이었고,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몰랐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셨고, 복음은 선포되었으며, 인간의 양심과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의 흔적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듣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멀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은혜를 받되 감사하지 않았으며, 허망한 생각과 어두워진 마음으로 무너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전체가 증언하듯, 인간의 타락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며, 인간의 외면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 집요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 6:1)고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결단, 복음을 선택지가 아니라 생명으로 붙드는 결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의 자리로 돌아오는 회개의 결단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라는 바울의 고백이 다시 우리의 고백이 될 때, 신앙은 형식에서 생명으로, 지식에서 순종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외면했음을 고백합니다. 말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복음을 선택이 아닌 생명으로 붙들게 하시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시고 감사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며, 오늘도 진리 앞에서 바르게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