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최근 김형석 교수의 한 인터뷰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교회 출석 수는 줄어들 수 있지만 기독교 정신은 사회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의 이 말은 단순한 종교적 당부를 넘어, 오늘 우리 사회의 방향을 묻는 질문처럼 들린다. 특히 어려운 시대일수록 교회는 평화와 사랑, 자유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는 그의 강조는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과연 평화에 얼마나 민감한가. 우리는 평화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가.

인류의 역사는 평화보다 전쟁의 시간이 더 길었다. 20세기만 보아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다.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문명은 처참히 무너졌다. 그러나 그 참혹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분쟁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왜 인간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의 경쟁 본능은 개인을 넘어 국가의 이해로 확대되며 힘의 논리를 낳는다. 시간이 흐르면 전쟁의 고통은 희미해지고, 이익과 욕망은 다시 고개를 든다. 여기에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는 평화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평화는 쉽게 흔들리는 가치가 된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요한 갈퉁은 "평화는 정의가 실현된 상태다"라고 말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야 할 질서"라고 했다. 두 사람의 통찰은 하나로 모인다.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말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평화 감수성이다. 평화 감수성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전쟁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마음에서 완성된다. 이 세 가지가 무너질 때 평화는 쉽게 무너진다.

이 감수성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는다. 교육과 문화 속에서 길러진다.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를 인정하는 공존의 태도,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하다. 전쟁은 언제나 상대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성경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선지자 이사야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세상을 꿈꾸었고, 아모스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외쳤다. 평화는 감정이 아니라 정의 위에 세워진 질서라는 선언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평화 감수성은 점점 무뎌지고 있다. 경제 불안은 불신을 키우고, 정치적 선동은 분열을 부추긴다. 과도한 민족주의와 진영 논리는 상대를 적으로 만든다. 이때 사회는 빠르게 균열되고, 평화는 가장 먼저 희생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폭력은 순간적인 힘은 될 수 있지만 정당성을 만들지는 못한다.

평화는 거대한 외교 무대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한 가정의 화해, 한 공동체의 이해가 쌓일 때 비로소 사회의 평화가 가능해진다. 결국 평화 감수성은 삶의 방식이다.

역사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제국에 맞섰다. 소금 행진과 단식 투쟁은 총칼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었고, 결국 한 나라의 독립을 이끌었다.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감옥 생활 이후에도 보복이 아닌 화해를 선택했다.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마주하게 했고, 그 선택은 내전의 가능성을 낮추며 새로운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평화는 강한 힘에서 오는가, 아니면 깊은 감수성에서 시작되는가. 평화 감수성이 높은 사회는 전쟁을 늦춘다. 평화 감수성이 사라진 사회는 전쟁을 앞당긴다.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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