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극작가 William Shakespeare는 인간의 비극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권력, 사랑, 배신, 그리고 가족의 파괴가 반복된다. 특히 Hamlet, Othello, King Lear, Macbeth로 대표되는 네 편의 비극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고통을 그린 작품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묻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을 집요하게 파고든 그의 통찰은 어디에서 왔을까.
최근 영화 Hamnet은 그 질문에 조용한 답을 건넨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 가정의 한 비극에서 출발한다. 그의 아들 Hamnet Shakespeare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건이다. 역사적 기록은 짧지만, 그 사건이 한 예술가의 영혼에 남긴 흔적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자연과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묻는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과거의 빛은 미래를 비출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을 끝없이 흔드는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유명한 대사는 훗날 Prince Hamlet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지지만, 그 질문의 씨앗은 어쩌면 한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자식이란 무엇인가.
어머니에게 자식은 몸을 찢는 산고 끝에 얻은 생명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에는 타협이 없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이 남는다. 영화 속 어머니의 눈빛에는 그런 모성의 절규가 담겨 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또 다른 의미다. 자식은 기대이고, 미래이며, 자신을 넘어설 꿈이다. 그러나 아이의 죽음은 그 모든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남겨진 아버지의 삶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끝없는 질문이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나날을 끝낼 용기가 인간에게 있는가.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또다시 살아간다.
그래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가족은 단순한 혈연의 공동체가 아니다.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운명의 공동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오늘까지도 공감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감정, 곧 모성애와 부성애가 그 작품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극을 경험한 자만이 비극을 쓸 수 있다.
문제는 이 비극이 한 가정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의 세계를 돌아보면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은 언제나 같은 장면을 남긴다. 부모가 자식을 잃는 장면이다. 그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서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인 Cain과 Abel의 비극도 결국 형제가 형제를 죽인 사건이었다.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가족의 상처는 존재했다. 부모의 눈물은 인류 문명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질문은 더욱 절박해진다. 평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정치와 외교의 계산 속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가슴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전쟁을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왕과 권력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가족의 슬픔이 흐른다. 한 아이의 죽음이 한 가정의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이 한 예술가의 작품이 되어 세계인의 마음을 흔든다.
어쩌면 인류가 아직 배우지 못한 교훈이 여기에 있다.
가족의 비극은 곧 인류의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자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 질문 앞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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