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 박사)는 8일 오후 서울 안암동 세미나실에서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교수의 삶과 신학’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아래 글은 이날 세미나에서 이오갑 박사가 발표한 논평문입니다-편집자 주
몰트만 생애와 사상에 관한 질문들
위르겐 몰트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학회를 한국신학아카데미에서 개최하게 된 것을 축하드리며, 또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세기와 21세기 밀레니엄의 마지막과 처음 두 세기를 관통하며 세계 교회와 신학계를 풍미했던 대(大)신학자 몰트만 박사님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김균진 원장님을 비롯한 그분의 직제자들이 모여서, 또 몰트만 박사님의 따님이신 프리드리케 교수님도 직접 모시고 이러한 행사를 한다는 게, 참으로 복된 일이고, 다른 신학자들에게는 정말 부럽고, 약간은 시샘도 드는 일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신건 교수 논문의 논찬을 맡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먼저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방대한 신학자의 사상을 어떻게 열 쪽 남짓 논문으로서 정리할 수 있었는지, 어쩌면 불가능한 작업을 하셨던 이신건 교수님의 고민을, 고충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이 교수님은 몰트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희망’으로 파악했고, 그 관점에서 그의 신학을 설명하셨는데, 어쩌면 상당히 축소하고 단순화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의 생애와 사상 전체를 놓치지 않고, 핵심적으로 잘 보여주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상당히 압축적이기도 하고, 또 몰트만 사상 자체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아서, 마냥 쉽게 읽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 먼저 이 글을 간단히 요약해보고, 정리하면서 떠올랐던 질문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몰트만 신학의 모든 주제와 내용은 항상, 줄기차게 성서가 증언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에 의해 추동되었다. 몰트만은 그러한 희망을 참혹한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러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 그의 신학은 처음부터 현재 속으로 들어오는 종말론적인 희망이라는 목표를 지향하게 되었고, 이러한 희망은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그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희망은 무엇보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세계 안이나 세계 밖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언들을 통해 알려진 ‘희망의 하나님’(롬 15:13),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지니신’(E. Bloch) 하나님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우리 안이나 우리 위에 가질 수 없고, 처음부터 항상 오직 우리 앞에서만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특징을 지니며, 종말론이다. 약속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현실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약속은 희망하고 순종하는 인간을 약속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역사는 약속되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취로 기울어지는 분명한 성격을 지닌다.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지금 경험하는 현실과 이전에 경험했던 현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은 주어진 약속과 성취된 약속 사이에 팽팽한 중간 지대를 만든다. 성취는 참으로 약속의 말씀에 비해 상당히 놀랍고 새로운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약속은 역사적 여건들과 역사적 표상들과 함께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오히려 약속은 그 확실성과 기대, 운동의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경될 수 있다.
예수의 사명(missio: 파송)은 오직 약속(promissio: 미리 보냄)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그의 미래는 하나님의 의(義)의 약속, 죽은 자들의 부활로 인한 생명의 약속, 존재의 새로운 전체성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통해 미리 밝혀진다.
하나님의 의의 약속에 관하여: 그것은 피조물의 생존의 총체요, 그 존립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의는 보편적이다. 만약 하나님의 의로부터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자신의 동료와의 올바른 관계, 온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가 생겨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의 미래로부터 만물의 새로운 상태를 기대하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종말론의 총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올 때, 새로운 창조도 기대될 수 있다.
부활로 인한 생명의 약속에 관하여: 부활은 보편적인 고난 극복의 시작과 원천이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음의 숙명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이 세계의 극복의 시작과 원천이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 생명의 원천으로, 그리고 하나님 약속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 이 약속은 만물 가운데서 성취될 것이며, 죽음의 숙명 앞에서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에 관하여: 이스라엘의 초기 시절부터 희망은 야훼 통치의 약속 위에 세워졌다.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현실적, 역사적 통치안에서 드러난다.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그리고 힘 있게 성취하심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역사적 통치에 대한 회상과 신뢰로부터, 세계와 모든 민족들, 만물이 하나로 어울려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보편적 통치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다소 거칠지만 이상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이신건 교수님의 논문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 몰트만의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이는 몰트만 자신도 많이 사용한 용어일텐데, 어떤 의미에서 ‘종말론적’인지 궁금합니다. 이는 논문을 읽어가면서 짐작할 수 있기는 하지만, 좀 더 명확히, 한 자리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 몰트만 신학이 ‘실존적 경험’에서 나왔다는 표현들에서도, 그런 표현을 많이 하지만 사실 ‘실존적’이란 말은 꽤나 기술적이고 철학적이어서,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어떻게 ‘실존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들어보면, 그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어떨지도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에서도, 그것이 ‘피조물의 생존의 총체, 존립의 근거’ ‘보편적’... 등이라고 서술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몰트만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썼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쩌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기본적인 용어들이 명확해지면 몰트만 성격이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마르크스나 블로흐 같은 철학자들과의 차이도 분명해지고, 또한 루터나 칼뱅 같은 전통적인 신학자들과도 그렇고, 뿐만 아니라 불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동시대 신학자들과도 대조되거나 혹은 중첩되면서, 그의 사상이 더 잘 보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