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공인 심리학자가 전하는 메시지: 당신은 단지 당신의 뇌 그 이상이다’(From a licensed psychologist: You are more than your brain)를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UC 버클리의 한 실험실에 앉아 유리병 속에 보존된 뇌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창백하게 빛나던 그 모습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소품처럼 보였다. 교수의 설명을 듣는 동안 필자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뇌의 장례식을 상상했다. 연단과 벨벳 천이 놓여 있고, 필자가 추도사를 전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오늘 ‘코그니시아 그레이’를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완벽한 전두엽을 보십시오. 병변도 없고 외상도 없습니다. 잘 보존된 뇌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관입니다.”

그러다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필자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문제는 이것이다. 유리병 속의 그 뇌는 한때 누군가의 것이었다. 기억과 후회, 갈망을 지닌 사람의 것이었다. 사랑과 두려움, 소망과 의미로 엮인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유리병 속에 떠 있지 않았다. 신경과학은 신경 활동을 놀라울 만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어떤 순간이 왜 중요한지, 상실이 왜 그렇게 깊이 아픈지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뇌는 물리적이다. 그러나 마음은 인격적이다. 기억과 믿음, 감정과 행동이 만나는 자리다. 뇌 스캔은 우리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할 때 어떤 영역이 활성화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왜 그 부재가 여전히 아픈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뇌는 해부할 수 있지만, 생각을 손에 쥘 수는 없다. 외과의사는 종양을 제거할 수 있지만, 사랑의 감정을 칼로 도려낼 수는 없다.

기술적 논쟁은 학자들에게 맡기겠다. 그러나 심리학자로서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해 오며 배운 것이 있다. 삶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뉴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신, 후회, 두려움, 희망을 이야기한다. 십대 자녀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쓰러지거나, 배우자가 떠나거나, 중대한 진단을 받거나, 미래가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외과의사, 과학자, 변호사 같은 뛰어난 지식인들조차 자신들의 이론적 언어를 잃어버린다.

과학은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의미와 도덕,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깊은 갈망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 만약 뇌가 인간 존재의 전부라면, 우리는 스캔과 데이터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그 간극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종종 내담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일은 교리나 정리된 설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훨씬 더 마음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일상의 경험 속에서 흔히 지나쳐 버리는 어떤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단순히 본능이나 생물학적 반응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부름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일상의 반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 더 많은 것이 있어야 해.”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을 거야.” “언제나 나를 부르는 어떤 다음 단계가 있어.” 내면 깊은 곳에서 부름을 받고, 질문을 받고, 응답해야 한다는 감각이 존재한다.

치료 현장에서 이것은 분명한 신념의 형태로 나타나기보다 미묘한 통증처럼 나타난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어떤 이는 “겉으로 보면 내 삶은 괜찮은데 뭔가 어긋난 것 같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나 번아웃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 남는다.

이 갈망은 너무 흔하기 때문에 쉽게 무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자극과 요구를 처리하는 신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듣고, 응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부름의 감각’이야말로 신학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성경은 인간의 몸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놀라울 만큼 진지하게 다룬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시편 139:13)라고 말한다. ‘조립했다’가 아니라 ‘짜셨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뇌와 신경, 호흡과 육체를 통해 의미를 담고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존재를 창조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드러난다. 몸은 작곡가가 아니라 악기다. 뇌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근원이 아니라 의미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도구다. 이를 혼동하는 것은 전기 기타를 에릭 클랩튼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현대 사상은 종종 어떤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면 그것의 의미까지 모두 설명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가정을 거부한다. 바울이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주를 위하여 있으며”(고린도전서 6:13)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한 윤리 이상의 것을 말한다. 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해 존재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무너질 때 순수한 물질주의적 설명은 충분하지 않게 느껴진다. 신경과학은 뇌의 활성화와 억제, 스트레스 반응, 기억 형성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슬픔이 찾아오거나 사랑이 압도하거나 양심이 침묵하지 않을 때, 신경학적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드러난다. 우리를 통해 일어나는 어떤 것은 단지 우리 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말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로마서 8:16).

증언이란 관계를 전제한다. 무엇인가 말해지고, 무엇인가 들려지는 소통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영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응답하고 받아들이는 존재다. 그리고 뇌는 이러한 내적 증언을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도록 돕는 물리적 기관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일상 경험 속에서 영적 확신을 인식하게 하는 통로다.

이것은 왜 기독교 신앙이 구원을 몸으로부터의 탈출로 이해하지 않는지도 설명해 준다. 목표는 육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다. 바울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고린도전서 15:53)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몸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실제 몸, 피로를 느끼는 근육, 배고픔을 느끼는 위장, 고통을 느끼는 신경계를 지니신 육신이었다. 만약 뇌가 스스로 모든 경험을 만들어내는 닫힌 체계라면,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성육신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뇌가 관계와 소통을 위한 도구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 곧 몸과 역사와 경험 속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으니,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불안함은 결함이 아니라 설계의 증거다. 마치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주파수에 맞춰진 라디오와 같다.

기독교의 주장은 반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환원주의에 대한 반대다. 뇌를 신격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한다. 몸은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도구일 뿐 근원이 아니다.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경험인 의미, 도덕적 책임, 사랑, 희망은 뉴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향곡이 나무와 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라고 말한다. 이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몸은 자신보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단순한 생물학적 기계의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이다. 때로는 불협화음이 있고 깨진 부분도 있지만 진짜 음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침묵시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회복하시고 본래의 선율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끄신다.

뇌는 소리를 받아들이고, 몸은 리듬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 음악의 근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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