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 김정석 목사) 선교국이 10일 오후 아현감리교회(담임 김형래 목사)에서 ‘개신교 한국선교 140주년 기념학술제’를 “믿음의 발자취 선교의 유산 ‘한국 개신교 140주년을 돌아보다’”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행사는 1부 예배, 2부 학술제로 진행됐다. 김형래 목사의 사회로 예배를 드렸으며 박재혁 장로(남산교회 전국연합회장)가 대표기도를, 맹약재 장로(교회학교 전국연합회장)가 성경봉독을 했다.
이어 황규진 감독(선교국위원장, 중부연회)이 ‘이스라엘아 들으라’(신명기 6:4-9)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황병배 목사(선교국 총무)가 축사를 했으며 김성복 감독(서울연회)의 축도로 예배 순서가 마무리됐다.
이어진 학술제에서 김칠성 교수(목원대)가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 기념에 관한 연구: 50주년과 100주년 기념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한국 개신교 선교역사 기념에 관한 연구
김 교수는 “2025년은 한국개신교 선교 140주년으로 다양한 기념행사가 계획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입국을 선교 시작으로 삼아왔지만, 본 연구는 한국개신교가 50주년(1934년)과 100주년(1984년)을 어떻게 기념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분석했다”고 했다.
그는 “최초의 기념은 1909년 미북장로회가 평양에서 개최한 25주년 행사였다. 언더우드가 의장을 맡아 의료, 전도, 자립, 교육, 여성사역 등 25년간의 성과를 보고하는 학술 발표 형식으로 진행됐고, 이는 훗날 로즈(H.A. Rhodes)의 <미북장로회 한국선교사> 집필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1934년 50주년에는 감리회가 매클레이의 1884년 서울 입국을 기념해 전국적으로 주일예배와 기념행진, 연극(‘At the Hermit’s Gate’)을 열었고,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구세군 악대 등이 참여해 선교 역사와 감리교 정체성을 대대적으로 고취했다”고 했다.
이어 “같은 해 장로회는 알렌의 1884년 입국을 기념해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학술대회 형식으로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선교 원리, 문서선교, 여성사역, 의료, 교육선교 등의 주제가 발표되고, 각 발표 뒤 토론과 기록이 이루어져 학문적 축적이 가능했다. 감리회와 장로회는 각각 독립적으로 기념했지만, 일정 부분 상호 교류가 있었고,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번역사업 같은 공동 사업도 시도되었으나 교단 내 갈등으로 완전한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주년은 50주년과 달리 교파 연합이 두드러졌다. 1980년대 초부터 ‘한국교회 100주년 준비위원회’가 조직돼 장로회, 감리회, 기타 교단들이 참여했고,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선교대회, 1985년에는 기념대회와 교육대회가 열렸다. 감리회는 매클레이(1884), 아펜젤러(1885), 스크랜튼(1885) 등 선교사를 기념해 서울 잠실체육관, 인천실내체육관, 이화여대에서 각종 행사를 개최했고, 장로회 통합·합동·고신도 언더우드와 알렌의 도착을 기준으로 별도 기념대회를 열었다. 교파별 자율성과 연합이 ‘함께, 그러나 따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했다.
끝으로 김 교수는 “50·100주년 기념에서 공통적으로 1884년(매클레이·알렌)을 기점으로 삼되 1885년(아펜젤러·언더우드)도 함께 기념했으며 기념 때마다 역사 기록물을 출판해 교회사 정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50주년은 교파별 분리기념이었고, 100주년은 교파연합 기념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라는 용어 대신 ‘한국개신교’가 정확하다. 향후 기념 사업은 역사학자 자문을 통해 시점과 명칭을 엄밀히 하고, 교단 협력과 신학적 성찰을 심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펜젤러 가문의 신앙과 의의
이어 소요한 교수(감신대)가 ‘아펜젤러 가문의 신앙과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소 교수는 “이 논문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주재 선교사로 알려진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조명한다. 저는 한국 교회사에서 아펜젤러 개인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의 헌신과 신앙 전통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는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해 배재학당을 세우고 근대 교육과 복음 전파를 결합한 선교 모델을 실현했다. 그의 초기 사역은 한국 개신교의 토착화와 교육 기반 형성에 결정적이었다. 그는 교육, 전도, 문서 출판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었다”고 했다.
그는 “그의 아들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아버지 사망 후에도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일제 강점기에도 배재학당과 감리교 교육기관을 지키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신앙과 민족정신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선교사임과 동시에 교육 행정가, 통역자, 교단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국 교회의 토착화와 자립에 기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아펜젤러 가문의 선교가 단순히 개인적 열심을 넘어서 가족 공동체적 헌신, 즉 자녀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신앙 계승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복음 전파를 넘어 한 사회의 교육과 문화, 신앙 전통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모델이 된다. 또한 배재학당 출신들이 한국 초대 지식인·독립운동가·교회지도자로 성장해 간접적으로 민주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끝으로 소 교수는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대 간 신앙 전수와 가정 중심 제자훈련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아펜젤러 가문처럼 교회의 리더십과 신앙 유산이 ‘가문적·공동체적 계승’으로 이어질 때, 교회는 단순한 기관을 넘어 한국 사회에 지속가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메리 및 윌리엄 스크랜턴 모자 선교사의 한국 선교
이어 서영석 교수(협성대)가 ‘메리 및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한국 선교’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서 교수는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조선에 도착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현 이화여대)을 설립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여성의 교육을 금기시했지만, 그녀는 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전하며,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복음적 인간관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했다. 이화학당은 이후 한국 여성계의 지식인, 사회운동가, 교육자를 배출해 한국 여성 지위 향상의 기초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 중 한 명으로, 1885년 배재학당 인근에 정동병원을 설립·운영했다. 그는 근대적 의료기술과 서양 의학을 한국에 도입했으며, 병원은 전도의 통로이자 사회 봉사의 장으로 기능했다. 스크랜턴의 의료선교는 치료와 전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통전적 선교 모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사회적 신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크랜턴 모자처럼 교육, 복지, 의료, 복음을 통합하는 포괄적 선교로 회복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과 사역은 한국 감리교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빛과 소금의 통전적 선교 모델’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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