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즈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괄호 안의 한자는 『陸史詩集』 초판본<1946>의 원문이다. 《曠野(遺稿)》는 1945년 12월 17일, 自由新聞에 게재되었다.)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본명은 원록(源祿),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경북 안동 도산면 生. 일제강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진보(眞寶, 일명 眞城)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1927년 독립운동단체에 가입, 1927년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전 생애 동안 17 차례나 투옥되었다. 육사라는 호를 가진 것은 대구 형무소 투옥되었을 시 수인 번호가 64번이었다는 데서 기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살아 생전 시집을 출간하지는 못하였고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옥사(獄死) 순국 후, 당대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둘째 동생 이원조(李源朝)가 형인 이육사의 시를 모아 1946년 유고시집인 <陸史詩集>(1946. 10.20)을 출간하였다. 유고시집 출간 시 동생 이원조는 형인 이육사의 시작활동에 대해 “30 고개를 넘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고 "혁명적 정열과 의욕이 시에 빙자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한 것"일 거라 회고하였다.
윤동주와 이육사 시인을 모르는 한국 성인이 얼마나 될까? 일제의 희생자들과 저항 운동에 참여한 우국지사들 그리고 문인들은 무수히 많았다. 육사가 유고 시집에 남긴 시편은 겨우 20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윤동주와 이육사 시인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제36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요 시인인 유종호 교수(1935~ )는 이육사에 대해 “개인적인 고려가 이육사를 실제 이상의 큰 시인으로 바꿔 놓고 있다는 사정은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개인사적 고려를 배제하고 가령 한두편밖에 안되는 그의 수작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했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도외시하고 그의 수작 겨우 스무 편만 가지고 광야를 대할 때 우리는 이 작품의 의미에 당황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육사의 대표작 ‘광야’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광야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은 詩 속 ‘조국은 함축’되어 있고, '민족 해방과 의지와 신념', '애국적 시' 등인 것으로 표현된다. 한 유명 평론가는 시 ‘광야’에 대해 ‘우주와 조국과 신인 합일, 토속 신앙, 조국의 신화, 전통 사회의 굿 타령’ 등으로 장황하게 해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필자는 그런 장황함을 ‘광야’라는 시에 연결하려면 배달(倍達)이나 고조선, 육당 최남선(1890-1957)의 불함(不咸)문화(1925년 탈고) 같은 거창한 서사를 활용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육사가 남긴 20편의 시에서는 그와 같은 모티브가 잘 보이지 않는다.
‘광야’는 지리적으로 거칠고 거주하기 부적당하여 경작지로 사용하기 힘든 넓은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광야다운 광야는 보기 어렵다. 그래서 일까? 육사는 너른 ‘광야(廣野)’보다 밝은 ‘광야(曠野)’를 詩語로 채택하였다.
광야다운 광야가 없는 한반도에 비해 성경의 광야는 조금 다르다. 애굽과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가 광야였고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40년 광야의 유랑 생활은 성경이 늘 상기시켜주는 모티브였다(시 78: 52-54; 암 2:10; 행 7:36; 히 3:17). 가나안 땅에 정착한 아브라함 가족의 세거지 브엘세바는 주변이 모두 광야요, 모세도 광야의 사람이었다(출 3:1). 다윗도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고,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마 3장, 눅 1:80). 이사야 선지자는 종말론적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가 나타나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광야라 했다(사 32:15-16; 35: 1-2, 6-10).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시험까지 받으셨으며(마 4:1) 기도하기 위해 광야로 나아가시지 않았던가(눅 5:16)! '광야'는 성경이 전하는 주요 모티브인 셈이다.
광야다운 광야가 보이지 않는 한반도에서 이육사는 광야의 이미지를 어디서 가지고 왔을까? “까마득한 날”이나 “하늘이 처음 열리고”, “광음(해와 달)”, “천고(千古)” 등도 민족 해방이나 애국적 모티브와 그리 어울리는 단어 같지는 않다. 오히려 육사의 '광야'는 성경의 이미지와 공명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기독 정치인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자신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겠다 했는데 글쎄, 성경적 해석을 덧붙인 것이라면 성경에 대한 오독이었다. 한때 동독의 관할 아래 있던 바이마르의 전시관에 정말 백마를 타고 나타난 짝퉁 초인의 초상이 있어 당황한 적이 있다. 무슨 이유로 “질풍노도의 상징” 사상가요 신학자였던 헤르더가 담임하던 역사 깊은 바이마르의 교회 전시관에 황당한 '김정은 장군'의 백마 탄 모습을 전시해 놓은 것이었을까? 지금도 궁금하기만 하다.
이제 우리는 이육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육사가 남긴 시편이 20편에 불과하다는 점은 그의 시적 내공을 명확히 평가하기에 지극히 적은 분량이라는 치명적 딜레마가 되고 있다. 그 적은 육사의 시편에는 '청포도' 같은 '한반도의 풍경'보다는 아프리카, 사라센, 고비사막, 수녀, 남십자성, 툰드라, 사막의 공주, 무지개, 왈츠, 속죄(贖罪) 같은 당대 시인들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시어들이 두드러진다. 이 비한반도적인 시어들을 어떻게 한민족 해방과 연결할 수 있을까? 그의 시 ’광야‘는 정말 시인의 동생 이원조 평론가가 육사 시집 발문에 쓴 대로 “천년 뒤 (찾아올) 백마 탄 초인”을 기다리며 우리 민족의 절망을 노래한 것이었을까? 필자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의 시 ’아편(鴉片)‘에는 남만(南蠻)의 “거리엔 노아의 洪水”가 넘쳐 난다는 구절도 보인다. 그는 분명 성경의 ’광야‘를 아는 당대 선각자적 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육사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께서 아버지 육사가 "늘 중국어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 성경은 육사의 유품 정리 시 어느 기자께서 말없이 가져가셨다는데 누군지 그 성경의 역사적 가치를 인지한 기자였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성경을 누군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요 혹시, 앞으로 육사가 늘 보던 그 성경이 우리 앞에 공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육사 詩에 대한 많은 수수께끼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신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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