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스콧 윌슨 박사
폴 스콧 윌슨 박사가 ‘설교와 예술-설교자를 위한 도구로서의 극성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승연 기자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노영상)가 28일 오전부터 29일 오후까지 신천성결교회(담임 박노훈 목사)에서 개교 20주년 국제실천신학심포지움을 ‘설교를 위한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심포지움 마지막 날 폴 스콧 윌슨 박사(토론토대학교 임마뉴엘칼리지 설교학 명예교수)가 ‘설교와 예술-설교자를 위한 도구로서의 극성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윌슨 박사는 “우리는 설교자들이 어떻게 하면 설교에 더 큰 흥미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상상력 있게 예술적으로 설교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설교자 자신은 어떻게 설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설교 안으로 가져오는 것인데 설교자가 ▲말로 예술 작품을 묘사하거나 재구성하여 전하는 방식 ▲실제 예술 작품을 예배 공간 안에 배치하는 방식 ▲시청각 장비를 사용해 예술을 보여주는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설교에 사용되는 예술은 단지 기술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아름답기만 해선 안 된다. 그 예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저속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외설적이거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은 안 된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설교자가 사용할 수 있는 예술은 종교적인 예술이나 기독교 작가가 기독교적인 주제로 만든 작품에 국한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설교자가 어떤 예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그 예술이 반드시 종교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설교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사용함으로 그 예술은 종교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또한 “설교자들에게 예술 작품을 설교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비유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예술적 감각은 설교자들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다. 예수님께서 상상력과 예술을 활용하시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분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의 장면을 말로 된 그림으로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그림에 ‘하나님 나라는 ~와 같다’또는 ‘세상 끝은 ~와 같다’와 같은 신학적 표현을 함께 사용하신다”고 했다.

이어 “1800년대 시인이자 설교자였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상상력은 ‘극성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아주 다른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활용할 때 그 안에서 ‘제3의 어떤 것’, 즉 새로운 의미나 통찰의 불꽃이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집어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마 13:33)는 비유도 그 예시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이고 여인이 빵 굽는 장면은 지극이 일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을 함께 묶었을 때, 예수님은 세상을 온전히 부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불꽃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상력은 두 개의 상반된 요소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의 불꽃이 일어나는 구조다. 예수님의 이 원리는 설교에서 오늘날의 사건들과도 연결하여 사용할 수 이다. 예를 들어 어떤 뉴스 사건을 보여주고, 그 옆에 신학적 생각을 함께 배치함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극성적 상상력은 서로 다른 두 극 또는 정체성을 나란히 배치하여 새로운 의미의 불꽃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설교 안에서 여러 차원에서 이 방식을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의미의 불꽃들은 ▲핵심 설교 아이디어와 예술 또는 뉴스 사건 사이의 불꽃 ▲이야기와 교리 사이의 불꽃 ▲예언자와 목회자 사이의 불꽃 ▲주제 문장과 성경 본문 전체 사이의 불꽃 ▲성경 본문과 우리 상황 사이의 불꽃 등이다”고 했다.

윌슨 박사는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극성적 상상력의 마지막 적용 예시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불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규칙, 경고, 심판, 형벌 등을 포함한다. 율법을 가장 간단히 이해하는 방법은 율법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회개하거나 용서하거나 사랑하는 등의 무언가를 행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부과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선물이지만, 그 자체로는 우리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구세주가 필요 없을 것”이라며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우리가 율법을 순종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도움을 제공한다. 이 도움은 은혜로 주어지며 우리가 그것을 얻어낼 수는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은혜의 요소가 설교에서 빠진다면 청중은 죄나 문제 속에 갇힌 채로 남게 된다”고 했다.

그는 “설교가 진정한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문제, 즉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명확히 말해주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이루고 계신 하나님의 구원 활동인 은혜가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회개와 변화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대신 지신다.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된다. 대부분의 우리는 설교의 형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아다. 그저 전에 받아온 형식을 그대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제 주장은 설교의 형식은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마름의 신학을 드러내야 하며 마음에 도달하는 설교, 즉 좋은 소식으로 나아가는 설교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교회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설교 형식은 본문의 해설에서 출발해 적용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형식만 사용하면 설교는 율법 중심, 곧 문제만 다루게 되고 좋은 소식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본문을 단 한 번만 다루면 결국 율법만 남게 되며 우리를 변화시키라는 요구만 남게 된다. 우리는 항상 회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설교에서 복음, 좋은 소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같은 본문을 한 번 더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은혜, 즉 본문 안에서 혹은 그 배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찾아야 한다. 본문 안에 하나님이 직접 언급되어 있다면 그 안에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드러나 있다면 그 부분에서 또는 더 넓은 성경적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찾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좋은 소식을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적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9장 16-23절을 생각해보길 바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지만, 그 권리를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바울에게 복음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자 위탁된 사명이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 사명을 받아들인다. 바울에게 있어 보상은 자신의 재정적인 선택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설교는 ‘우리는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며 다른 보상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회중에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훌룡한 교훈입니다’라고 전개될 것”이라고 했다.

윌슨 박사는 이어 “그런데 이렇게 전개할 때 이 안에 좋은 소식은 어디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몇 가지 핵심을 염두에 두면서 전해야 하는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대가로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능력을 주시고 사람들의 필요가 있는 그 자리에 찾아가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다”고 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은혜를 강조하는 설교가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행동해야 하며 죄는 여전히 존재한다. 부활절은 성금요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속하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루터는 ‘우리는 의롭고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몰로 힘을 얻는다. 율법과 복음, 문제와 은혜, 그 사이의 불꽃이 바로 믿음이다”고 했다.

그는 “저는 선포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해방’과 ‘복음’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담대히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 2-8절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그런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저는 ‘복음을 행한다’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데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직접 청중에게 사랑으로 말씀하신다는 의미다. ‘너는 내 것이다. 나는 너를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내가 너에게 평화를 준다.’ 이런 의미에서 선포는 단순히 설교의 동의어가 아니다”고 했다.

끝으로 윌슨 박사는 “주제 문장은 성경에 대한 선언이며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 은혜의 행동을 하고 계신다는 내용이다. 주제 문장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며 “설교는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더욱 깊고 예민하게 인식하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복음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한다. 복음은 우리를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곧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선포란 ‘복음을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임재 속에서 이뤄지는 기술적이며 상상력 넘치고 아름다운 성례적 행위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다”고 했다.

이어 허요환 목사(안산제일교회)가 ‘극장교회론에 따른 설교 사역: 예루살렘과 브로드웨이는 무슨 관련이 있나’, 구아름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교학)가 ‘반응적 소통으로서의 체현된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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