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아서 박사
에디 아서 박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에디 아서 박사의 기고글인 ‘부활절은 항상 권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를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에디 아서 박사는 와이클리프 성경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영국에 거주하며 글로벌 선교의 미래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사회 변화에 대한 맥락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주치는 한 가지 문제는, 어떤 본문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 그 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는 종종 성경을 오늘날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당시 목격자들에게는 명백했을 상징이나 의미를 놓치게 된다.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일주일 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주간(Holy Week)’이라 불린다. 이 기간은 영적인 의미와 상징으로 가득하지만,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서는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종려주일 (Palm Sunday)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무리들은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장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드문 사건 중 하나다. 종종 이 장면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이라 부르는데, 이 표현이 이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트라이엄프(triumph)’는 로마 장군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예였다. 해외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 로마 장군은 병사들과 정복한 포로들, 노예들을 이끌고 로마 거리로 개선행진을 할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큰 축제였고,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계기였다. 이러한 승리의 행진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고, 제국 내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힘의 과시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러한 로마의 개선행진을 비유로 사용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시키시고,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이 구절에서 바울은 정복된 자들이 로마의 개선식에서 공개적으로 조롱당하듯,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의 세력을 십자가를 통해 무력화시키셨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로 자주 오해받는 구절이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이 본문에서 핵심은 ‘예수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이다. 로마의 개선식에서는 군대가 도시 외곽에 이르면 나팔 소리가 울리고 시민들이 나가서 장군을 맞아 함께 도시로 입성하며 환호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시며, 그분의 백성들이 나아가 맞이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예언 성취나 겸손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의 힘 과시 방식을 의도적으로 전복하는 행위였다. 우리는 그 상징을 놓치기 쉽지만, 당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 (The Crucifixion)

로마 제국과 초기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개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이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비교적 안정된 질서와 여행의 자유가 있었으며, 바울 같은 인물도 이를 이용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는 잔혹한 노예제와 조직적인 폭력을 통해 제국을 유지했다. 팍스 로마나는 ‘십자가’라는 공포의 수단으로 유지된 것이었다.

이 배경 속에서 바울은 골로새서 1:20에서 놀라운 선언을 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되…”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평화’는 익숙한 개념이었다. 단, 그것은 반역자를 말살하는 ‘위협’이었지, ‘화해’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 개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창조주이자 황제보다 위대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폭력과 억압의 상징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희망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로마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그 대가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함이었다. 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진정한 평화와 회복을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의 다른 사건들

예수님께서 성전의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 등도 이런 패턴을 보여준다. 권력 구조와 세속적 위계질서를 전복시키는 행동이다.

예수님이 단지 팔레스타인의 무덤 어딘가에 묻혀 끝났다면, 이 모든 전복적 행위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진정한 권위와 능력을 증명한다. 이는 단지 죄 사함을 확증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가장 강력한 정치 권력이 예수님을 이기지 못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나귀를 탄 무명의 유대인 랍비는 로마의 가장 위대한 장군보다 강했고, 로마의 잔혹한 십자가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은혜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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