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四旬節, Lent) 기간이다.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을 뜻하는 사순절은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이자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으로 신앙 성장을 도모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게 ‘금식’이다. 성도들 간에 수 세기 동안 엄격하게 지켜졌던 ‘금식’은 초기엔 저녁 전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다가 점차 규정이 완화돼 14세기부턴 ‘금식 기도’가 ‘절식 기도’로 대체되기도 했다.
사순절에 성도들이 ‘금식’, 또는 ‘절식’을 하는 건 내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단지 한 끼를 굶는 것이 아니라 오락과 사치 생활을 자제하고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을 권장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초대교회부터 이어져 온 사순절은 오늘까지 다양한 의미와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으나 그 모양과 방식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찰과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절기라는 한 가지이고 그 중심에 ‘금식’이 있다.
교계는 오래전부터 사순절 기간에 ‘생명사랑 나눔운동’을 실천해 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취지다. 그 중 대표적인 게 헌혈과 장기기증 운동일 것이다. 헌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장기기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회복된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코로나19 펜데믹 때 15개 교회 목회자들이 ‘대한민국 피로 회복 캠페인’이란 걸 시작했다. 어려운 시기를 겪는 국민에게 한국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뜻에서다. 이들은 매년 성탄절에 ‘피로 회복 캠페인’을 시작해 그 이듬해 부활절까지 모금된 금액과 헌혈 증서 등을 소아암과 희귀 난치 질환을 겪는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대북구호단체인 국제사랑재단은 매년 사순절 기간에 ‘북한 결식어린이 한 생명 살리기 캠페인’ 전개해 왔다. 또 지난 2018년부터 매년 사순절 기간에 ‘40일간의 동행’ 기도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 기독교 NGO 샘복지재단도 사순절 기간에 금식 기도에 동참하고 한 푼 두 푼 모은 저금통을 북한 동포와 지구촌의 소외된 이웃에 쓰이도록 전달할 예정이다.
그런데 매년 사순절 기간에 행하던 ‘금식’을 통한 생명 사랑 나눔 참여가 최근 들어 점차 퇴조하는 분위기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변수가 있어서겠지만 그와 함께 생명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노력까지 수그러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주요 교단들은 최근 탄소 배출 저감 등 기후위기 대응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예장 통합은 지난 2022년 9월 제107회 총회에서 ‘총회 기후 위기 대응 지침’과 ‘2050 한국교회 탄소 중립 로드맵’을 공식 채택했다. 기감도 같은 해 10월 35회 총회에서 총회·연회 내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2050 탄소 중립 선언’을 발표했다. 이처럼 각 교단에서 시작한 탄소 배출 저감 운동이 사순절을 가해 ‘녹색 사순절’이란 이름의 실천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교단마다 비슷한 이름의 기후위기 대응지침을 발표하고, 지 교회에 실천을 독려하고 있느나 꾸준히 실천하는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다. 총회가 결의한 선언적 의미엔 공감하지만, 여건과 현실이 받쳐주지 못해 동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교단들도 결의는 했지만, 예산·인력 문제 등으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 나온 묘안이 ‘탄소 금식’이다. 한 끼 식사를 거르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소 배출도 ‘금식’처럼 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기감과 기장 등 교단은 올 사순절에 △자동차 대신 걷기, △빨래는 모아서 돌리기, △냉장고 적정 온도 설정하기, △대기 전력 줄이기 등 ‘탄소 금식’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성공회도 ‘녹색 사순절’ 캠페인의 일환으로 △대중교통 이용,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에너지 절약 등 탄소 배출 저감 활동에 적극적 동참을 요청했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탄소 금식’은 어떤 의미에선 한 끼 식사를 거르는 ‘생리적 금식’보다 훨씬 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고 미래 세대에 건강한 삶의 터전을 물려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탄소 금식을’ 왜 굳이 사순절에 해야 하는가 하는 당위성 문제다. 탄소 금식은 1년 365일 해도 모자랄 중요한 생활 실천과제다.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국민 모두 생활 속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당면 과제가 아니겠나. 그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에 맞추는 것이 오히려 동기부여와 실천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순절에 성도의 ‘금식’은 나를 비우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과정이다. 종교적 고행이나 의식이 아니라 욕망과 탐심을 물리치고 태우는 깊은 영적 체험의 시간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고 하셨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단적 정치 상황 속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있다. 저출산과 고독사, 낙태, 자살률의 급격한 증가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나를 비우고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변화의 동력을 일으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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