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

지금부터 40여 년 전, 내가 남강문화재단 일을 보던 시절에 남한산성으로 재단 이사장이던 한경직 목사님을 종종 찾아뵙고 말씀을 듣던 추억이 새롭다. 한 번은 한 목사님이 학창시절 은사인 남강 이승훈 선생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시던 기억이 난다.

1918년 가을에 졸업을 앞둔 한경직 목사님이 두 친구와 함께 남강의 거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초저녁시간인데 몸이 불편하시다고 자리에 누워 계시다가 일어나 맞아주시면서 “오늘이 바로 내가 몇 해 전에 감옥에서 일본 놈들에게 실컷 매를 맞은 그날이다. 이상하게도 매년 이날이 되면 매를 맞은 자리가 몹시 아파 몸을 가누지 못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105인 사건’ 때 고문당한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날 한 목사님은 남강 선생의 등을 쓰다듬어 드리다가 등바닥이 온통 채찍자국인 것을 보고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한 목사님은 이듬 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거리에 나갔다가 남강이 민족대표로 선두에 선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다시 독립운동에 앞장 선 것을 생각하니, 몇 개월 전에 집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들 들어라. 나 이승훈이는 죽을 때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을꺼야!”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더라고 회고해주셨다.

김형석 교수 제주도 조천의 남강 유배소 보존식(1990.10.10) - (좌1)한경직 목사, (좌4)필자
제주도 조천의 남강 유배소 보존식(1990.10.10) - (좌1)한경직 목사, (좌4)필자 ©김형석 교수 제공

이렇게 철저한 민족교육과 기독교교육을 가르친 오산학교(五山學校)는 한국근현대사에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명문 사학이다.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설립자이고, 고당 조만식 장로가 교장으로 교육을 담당하던 이 학교에서 한국교회사의 큰 별인 주기철 목사와 한경직 목사가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이던지 한민족이 살던 곳에서는 독립을 외친 3·1운동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국내적으로도 민족의식과 자유사상을 고취시킴으로써 한국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3.1운동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것은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민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층이 주도하였으며, 특히 기독교인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민족종교를 표방하며 1백만 신도를 자랑하던 천도교에 비해 국내에 유입된 지 40년이 채 되지 않고 전체 신도수가 25만 명에 불과하던 기독교가 가장 많은 민족대표를 배출한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민족대표 선정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남강의 활동에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심이었다.

이것은 3.1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구속된 사람의 종교별 통계를 살펴보아도 알 수가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전 국민의 1.25%에 불과하였지만, 구속자의 22.5%를 차지하였다. 비율로도 15%인 천도교나 1% 미만이던 불교와 유교를 압도했고, “이제 기독교는 국민의 종교가 되었다”는 격문이 나붙을 정도였다.

그러면 한국 기독교는 왜, 애국하는 종교가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국내외 정세와 관련이 있다. 19세기 말 조선은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안으로는 관리들의 부패와 자연재해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그런데 선교사들도 이 같은 조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일기를 살펴보자.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하였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철책을 부수고 일어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있는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아펜젤러 일기, 1885.4.5)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에 나섰다. 근대적인 학교를 설립하고 민주주의와 애국심을 가르쳤다. 서구 문문을 접하게 된 젊은이들은 기독교에서 개인과 국가의 비전을 발견하였고, 독립협회를 통해 민족주의와 시민운동도 체득했다. 또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구국을 위한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국지사들이 중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한성감옥에는 이승만의 전도로 40여명의 죄수와 옥리가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는 이상재·이원긍·홍재기·김정식·유성준 같은 저명한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한성감옥 집단 개종사건'인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던 그들은 콜레라가 창궐한 감옥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을 목격하며 성령 체험을 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운동과 성령체험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콘텐츠가 만나 새롭게 태어난 곳이 한국교회이다.

한성감옥의 종신수 이승만(완쪽)과 앞줄의 유성준(좌3) 이상재(좌4)
한성감옥의 종신수 이승만(완쪽)과 앞줄의 유성준(좌3) 이상재(좌4) ©김형석 교수 제공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민족적 에네르기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사회참여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만든 한서 남궁억은 “한 몸 안에서 불타 솟아난 신앙이라야 나라도 구하고 겨레도 구제한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 진리이다. 나라가 어려우면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라는 것이 3.1운동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영락교회가 발행하는 <만남>(2024년 3월호)에 수록된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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