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리처드 하웰 박사의 기고글인 ‘럽의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넘겨준 결과였다'(Europe didn’t lose Christianity overnight. The Church gave it away)를 1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리처드 하웰 박사는 케일럽 인스티튜트(Caleb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총장이다. 그는 1977년에 설립된 하나님의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l Church of God)의 의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유럽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설명은 너무 단순하고, 현대 세속주의를 지나치게 미화하며, 교회에게도 지나치게 편리한 이야기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위기의 원인이 과학이나 자유주의, 혹은 “밖에 있는” 도덕적 타락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불편한 진실은 이것이다. 유럽에서 기독교는 단지 외부로부터 밀려난 것이 아니라, 많은 곳에서 내부로부터 속이 비어 갔다.
그래서 유럽 기독교의 위기는 단순히 무신론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교회가 신뢰를 잃고, 진지함을 잃고, 결국 사람들에게 들을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이야기다.
대성당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교회의 절기들은 여전히 달력 속에 남아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필요할 때면 여전히 “기독교 가치”를 언급한다. 인구 조사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표시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은 폐허로 남은 기독교, 분위기로 남은 기독교, 향수로 남은 기독교에 가깝다. 제자도 없는 유산, 순종 없는 기억, 회개 없는 정체성이다.
그런 기독교는 유럽을 구할 수 없다. 수세기 동안 유럽은 단지 기독교가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유럽 자체가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었다. 교회는 유럽에게 죄와 자비, 법과 인간의 존엄성, 고통과 죽음, 그리고 소망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유럽의 예술과 음악, 도덕적 언어, 대학, 공적 상상력은 기독교적 전제들로 깊이 물들어 있었다.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틀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 속에는 독이 숨어 있었다. 기독교가 문명 자체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문화, 복음과 권력, 세례와 소속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교회는 영향력을 얻었지만 종종 그 대가로 명확성을 잃었다.
따라서 쇠퇴는 바로 그때 시작된다. 교회가 공격받을 때가 아니라 편안해질 때다. 교회는 영적으로 약해진 뒤에도 외형적으로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다. 교회는 건물을 가득 채우면서도 신앙은 비워 버릴 수 있다. 성례는 유지하면서 회심은 잃을 수 있다. 교리를 수호하면서 거룩함을 놓칠 수 있다. 유럽에는 그런 기독교가 많았다. 관습으로서의 기독교, 국가 전통으로서의 기독교, 민족의 기억으로서의 기독교였다. 그러나 종종 부족했던 것은 값비싼 제자도였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표현은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준다. 유럽은 회개 없는 용서, 순종 없는 소속, 그리스도 없는 종교를 제공하는 법을 배워 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 문명에 대해서는 끝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침묵하는 교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결국 여러 사건들이 그 실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관들의 부패, 종교 전쟁, 제국과의 타협 그리고 민족주의적 우상숭배다.
유럽이 기독교를 떠난 것은 단순히 세속화 때문만이 아니다. 교회가 그렇게 할 이유를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럽의 영적 붕괴를 세속 엘리트, 이민 문제, 성 윤리, 소비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물론 그 비판 가운데 일부는 타당하다. 그러나 교회 자신의 책임을 건너뛴다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신앙을 문화적 지배와 혼동하는 교회는 결국 문화가 자신을 밀어낼 때 놀랄 이유가 없다.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들만의 회피가 있다. 그들은 해결책이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교리를 부드럽게 만들고 요구 수준을 낮추며 확신에 대해 사과하고 가능한 한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부드러운 무력함이 아니다. 탈기독교적 사회의 감정을 달래는 종교적 위로자가 되는 교회도 아니다. 만약 유럽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너무 기독교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경우 충분히 기독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도전적인 주장이다. 유럽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문명(Christendom)의 복원이 아니다. 사실 많은 면에서 그리스도교 문명 자체가 문제의 일부였다. 교회는 정치적 연극이나 문명적 공포를 통해 문화적 헤게모니를 되찾으려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기독교 유럽”이라는 표현은 종종 기도와 회개, 거룩함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이민자, 무슬림, 외부인에 맞서는 부족적 구호로 사용된다. 국경 표지판으로 사용되는 십자가는 기독교의 회복이 아니라 배신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은 자신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속주의에 대한 답은 신학적 당혹감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 없는 확신, 과시 없는 거룩함, 강요 없는 공적 증언이다. 유럽은 이미 약한 설교, 모호한 영성, 도덕적 상투어를 충분히 들어 왔다. 정치와 심리치료, 광고가 이미 그것을 넘치게 제공하고 있다.
유럽에 부족한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교회다. 그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는 것처럼 예배하는 교회 ▲죄와 권력, 탐욕과 욕망, 죽음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교회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보다 약자를 보호하는 교회 ▲과거의 영광에 취하지도,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교회다.
마지막 부분이 중요하다. 유럽에서 기독교의 미래는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적 지배력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과거의 제도적 특권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종 권력이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더 진실해진다.
유럽은 분명 탈기독교 문명(post-Christendom)의 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 이후의 시대(post-Gospel)가 된 것은 아니다.
오래된 기독교의 껍데기는 갈라지고 있다. 사실 그 가운데 일부는 깨져야 했다. 지금 이 순간을 견디지 못할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남는 것들은 더 단순하고, 용감하고, 정직하며, 깨끗한 신앙일 것이다. 향수는 줄어들고, 부족주의도 줄어들 것이다. 대신 더 기도하고 더 성경적인 교회가 남을 것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기독교는 이렇게 변해 왔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문명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습관이 되었다. 마침내 기억이 되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단 하나다: "그것이 다시 믿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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