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기독일보 DB
카이퍼와 이승만은 위대한 정치가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꿈이 같은 것이 많다. 그 둘의 생각은, 사람을 바꾸고 나라를 바꾸는 것은 <교육>밖에 달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이퍼의 시대에 유럽과 화란은 위기였다. 정부와 의회 그리고 대학은 완전히 좌파들의 세상이었다. 즉 과학주의와 인본주의가 거의 종교가 되었고, 진화론적 세계관이 정치, 학문, 심지어 종교계까지 허물고 있었다. 당시의 학교는 모두가 국립인데다, 대학교수들의 임명권은 오직 정부만이 했다. 그러니 좌파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상을 가진 교수들만 기용하고 자유와 개혁주의적이고 신본주의적 뜻을 가진 교수는 임용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청년들은 대학 가기가 무서웠다. 왜냐하면 무신론 적이고 진보적인 색깔을 가진 교수들이 대학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학교수가 좌파들의 소굴이 된 것이다. 아무 데도 성경의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데도 없고, 그것을 문제시하거나 의식하는 자도 없었다. 이때 암스텔담 중앙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는 유물사관을 갖고 점점 사회주의로 흘러가는 대학의 학문을 그대로 볼 수만 없었다. 교육이 썩었으니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사립대학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1880년 10월 교수 5명, 학생 5명을 가지고 개혁주의 대학(Universitat Libe-
ra Reformata)을 세웠다. 거대한 공조직의 대학들이 볼 때는 헛웃음 칠 일이고, 약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학교였다. 그러나 카이퍼는 이 학교를 개교하면서 그 유명한 <영역주권 사상, Souvereiniteit van Eigen Kring>을 발표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그냥 교회당 울타리 안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률, 의학 등 삶의 전 영역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Pro Rege) 모시는 학문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카이퍼를 비롯한 4명의 교수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물론 교수 한 명에 학생 한 명으로 시작된 학교는 어쩌면 거대한 코끼리 위에 파리 한 마리 앉는 격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은 국가주의에 실망하고 있었기에 카이퍼의 개혁주의 노선을 찬동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모금 운동이라 해봐야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진이 그려진 동전 넣는 조그마한 양철통이 전부였다. 그때는 그것이 유일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학생은 점차 늘어났고, 정부의 도움 없이 힘닿는 데로 평신도들이 적은 돈을 모아 캠페인을 벌렸다. 그리고 점차 시민들은 카이퍼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중심, 성경 중심의 세계관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처럼 교육이란, 결국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고, 무지하면 죄가 되고 소망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카이퍼라는 한 사람의 결단으로 시작된 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자유대학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대학은 국가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학문 자체를 연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자유라는 말에는 ‘교회의 교권이 대학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감 놔라 배 놔라 못 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이 대학다워지는 것은 어떤 외부 정치 세력의 입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은 성경적 진리, 학문적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자유(Vrij)라는 단어를 선점했던 것이다.

그 후 카이퍼가 세운 대학은 급성장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교수들이 각계각처에 들어가서 논리적으로 가르치니 학생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자유대학에서 배출된 기독교적 석학들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진을 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개교 140년이 지난 지금은 처음 개혁주의 정신이 퇴조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정치, 법률, 신학, 철학, 문학, 역사, 공학, 의학, 물리학 분야에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귀히 여기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 화란 수상을 지냈던 발케덴데(Peter Jan Balkenede) 전 수상은 자유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서 유럽 경제의 대안을 내놓는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퍼의 교육 개혁의 열정은 대학에만 그치지 않고, 사립 기독교 고등학교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립학교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 기독교 고등학교, 기독 대학이 많이 생겼다.

동시대에 이승만은 왕을 폐하려는 운동에 가담했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6년 가까운 고통의 시간에 그는 어학을 뚫어내고, 다양한 책들을 모두 탐독하여 실력가가 되었다. 일찍이 그가 받은 동양학, 유학과 불교 문화를 뒤로하고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중생의 체험을 하면서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180도 달라졌다. 중생의 체험을 한 이승만은 다른 죄수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간수들도 그에게 배우려고 했다. 마치 바울이 죄수의 신분임에도 옥사 장들에게 복음을 전했듯이, 이승만은 그 이후로 교육사업에 올인했다. 하와이 한인 학교를 비롯한 인천의 <인하대학>을 세워 양육했고, 이 땅에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켜 글 모르는 사람을 없이 했고, 인재들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대거 미국으로 유학을 시키기까지 하였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깨어 있는 교육자>였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서로 닮은 것은 <교육>을 통해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대안은 <기독교적 세계관 교육>이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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