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복음에 빚진 자』(사도행전, 2019)의 저자 이민교 목사의 얘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원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아와 장애인에게 온 마음을 쏟던 그는 일찌감치 원불교 교역자인 교무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불교의 지도자가 되려고 어느 날은 눈이 쏟아지는 날에 고무신을 신고 지리산 천왕봉을 몇 차례 오르는 고행의 길을 걷기도 했다.

원불교 전도사를 자처한 그는 고3 때 소록도를 방문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석가모니를 믿게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헌신하며 희생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꿈쩍도 하지 않는 그들이 야속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하다는 말도 좋아요. 그런데 솔직히 한센병 환자가 예수 믿어서 행복하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게 어떻게 행복한 거예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영원히 살기 때문이지. 우리가 문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어.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멋모르고 살다가 지옥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이 우리를 문둥이로 만들어 주셔서 이제는 예수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살아도 천국에서 살고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거지.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지금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학생도 이제 예수님 믿어봐. 예수님 믿어야 행복해지지.”

‘전생에 당신들이 지은 업보인 죄로 인해 이생에 문둥이라는 과업을 받았다’라는 부처의 법문을 설법하는 그의 입술이 점점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 속에 이런 화두가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더 불쌍히 여기는 그들의 배짱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 믿으면 행복하다는데, 그 예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7년 후 1988년 3월 2일… 그는 결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소록도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한 다음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염불이 되지 않고 엉뚱한 말이 터져 나왔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지? 그것은 소록도 한센인의 장례식 때마다 들었던 찬송가 606장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가사였다. 한참을 울며 뒹굴다 성령에 휘감긴 그는 그 즉시 회심하고 ‘기독교 전도사’로 대변신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만나 눈이 멀었던 사울처럼 그때의 그도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자신이 ‘복음에 빚진 사람’임을 고백하며, 약사로 일하던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서 축구를 통해 농아교회를 개척했다.

911 사태 이후엔 카자흐스탄에서 국가대표 농아축구팀 감독으로 아시안게임 4회, 올림픽 2회, 월드컵 1회 출전했다. 현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증거하는 삶을 사는 GP 사역자로, 북조선 농아축구팀 감독으로 북한을 오가며 사단법인 Global Blessing 대표로 장애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

이민교 선교사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걸 느껴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을 때가 많다는 점이다. 가난한 신학교 입학생을 주지 스님으로 하여금 등록금을 대도록 해서 전도로 크게 부흥한 교회 담임목사로 만드시질 않나,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전하러 간 청년을 변화시켜 목사가 되게 하시고 선교사로 북한의 농아축구팀 감독으로 만드시질 않나...

이민교 선교사의 책 속에 나오는 한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소록도 화장터 옆 동네인 구북리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때 간호사들이 와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한센병 환자들 중 한 사람의 입에 침이 흘렀나 보다. 그 모습을 본 그의 행동이 그의 책 85페이지 밑에서 4~5째 줄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어느 환자의 침이 흐른 것을 ‘핥아주고’ 있었다...”

“핥아주고”란 구절을 여러 번에 걸쳐서 눈을 비비고 읽어보았다. 어두침침한 눈으로 “닦아주고”라는 말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무리 읽어봐도 “핥아주고”가 틀림없었다. 한센병 환자의 침을 닦아주는 일도 쉽지 않거늘 그 환자가 흘리는 침을 혀로 핥아주다니, 인간으로선 어려운 일이다.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그 모습을 직접 지켜본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현장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목사님 한 분이 그에게 예수 믿는 사람인지를 물었다. 이 선교사는 소록도에 오게 된 이유와 거기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연을 간증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신학공부를 해서 사명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게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항상 우리의 예상을 뒤집어 엎는다. 모태 신앙인이든 나중 신앙인이든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다 목적이 있다. 오늘 나는 그 목적에 부합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점검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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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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