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철 교수
이신철 교수가 미래교회포럼 1차 대구포럼서 발제를 하고 있다. ©미래교회포럼 영상 캡처

미래교회포럼(대표 오병욱)이 25일 오전 대구 수성구 소재 대구샘물교회(소재운 목사)에서 ‘고신70주년과 고신 신학교육의 길’이라는 주제로 2022 미래교회포럼 1차 대구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이신철 교수(청주등대교회)가 ‘한상동과 고신의 정체성 그리고 과제’라는 주제로 첫 발제했다.

이 교수는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창자였고, 해방을 맞아 출옥한 후에는 주남선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며 “승동측과 합동의 선봉에 섰다가 돌연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여 환원의 전환점이 되었고, 환원 이후 총회 직영이 된 고려신학교 학장이 되어 이사장이었던 송상석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반고소파의 고신 이탈을 쓸쓸히 지켜보았던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일제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강요는 1930년대 초에 먼저 각 급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가르치면서 제국의 신민이면 누구나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며 “선교부가 운영하던 기독교학교들도 신사참배의 명령을 회피할 수 없었고, 이에 불복하던 학교들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식민세력은 로마 가톨릭교회, 제7일 안식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등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1938년에는 한국장로교회 총회마저 공개투표를 통하여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압박에 굴종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신사참배강요 앞에 철저히 무너진 한국장로교회 안에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한 대표적 인물은 주기철이었다. 그는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흔들림 없이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굳건히 선포했다”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는 그 교회의 성도들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성도들과 목사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또 “주기철 외에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목사들과 성도들은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장한 대표적인 분들로서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이 있었다”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은 정치적 항거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고,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독려하던 ‘타협한 교회’로부터 성도들을 불러내어 그 죄에 참여하지 않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지키려 함에 초점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기선은 1940년에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천명했는데 먼저, 자녀들을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보내지 말 것이며, 둘째로 타협한 교회를 떠남으로써 그 교회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할 것이며, 마지막 셋째로 따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신실한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을 교회로 조직할 것이었다”며 “이것은 반대운동을 넘어선 교회설립운동이었다”고 했다.

더불어 “마산문창교회 목사 한상동과 그의 동지들은 1940년 1월에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제안했다”며 “먼저는 현 노회 해체운동이며, 둘째로 신사참배 목사의 수세불능, 셋째로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신노회를 조직하고, 넷째로 신사 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 도모하고, 그룹 예배의 여행과 함께 동지 획득에 주력하는 것이다. 타협한 교회를 떠나 따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을 모아 새 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한 이기선과 비교해 볼 때 한상동은 더 나아가 현 노회의 해체와 신노회의 조직을 주장한 것이 명시된 차이점이다. 그러나 주기철은 교회나 노회를 따로 세우는 조직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보다 각 사람이 자기의 양심대로 행동하도록 일임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의 죄를 범한 교회들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들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일본 교단의 탈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목사들로서는 옛 교회의 이름을 다시 걸고 옛 노회, 옛 총회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을 것”이라며 “하지만 1945년 9월 20일 출옥 성도들은 한국장로교회의 회복을 위해 제도적 교회의 환원 또는 재조직에 앞서 영적 회복이 우선임을 주장하고 목사와 장로들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권징을 받은 후에 교역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과 신실한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을 촉구했다”고 했다.

이어 “일반 성도들도 신사참배의 죄를 범하였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먼저 노회 그리고 총회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써 전체 교회를 신사참배로 끌고 갔던 것이기 때문에 목사 장로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며 “그러나 자책 또는 자숙 그리고 최소 2개월 간의 휴직 등의 권징은 교회를 우상숭배의 죄로 몰아간 목사와 장로들의 엄중한 죄에 대한 권징으로 보기엔 매우 가볍고 부적절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실제 한국장로교회의 복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1946년 초까지 경남노회를 필두로 여러 노회들이 하나씩 그들의 옛 노회가 재조직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2일 남북 왕래가 점점 어려워지던 상황에서 각 노회의 대표들이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남한에 있는 노회들로 남부대회의 조직을 우선 선언하고 추후 이북의 교회들과 노회들이 참여한 총회를 재조직하기로 했다”며 “남부대회는 제27차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잘못되었으므로 삭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신사참배자들의 권징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국에 충성하는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신학교를 대회가 직영하기로 결정했다. 소위 재건파는 신사참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겉모양만 다시 갖춘 한국장로교회를 현실교회 또는 사탄의 회라고 정죄하고 철저한 단절을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출옥 성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목사들은 일단 한국장로교회의 노회와 대회의 제도적 복원을 수용했다”며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최상림, 조수옥 등의 출옥성도들을 배출한 경남노회는 1945년 9월에 출옥성도들의 자숙 안에 의거하여 목사들과 장로들의 자숙을 결의를 했고, 특히 주남선과 한상동은 한국장로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목사들의 양성을 조선신학교에게 맡길 수 없다고 보고 바른 신학에 입각한 목회자와 전도인 양성을 위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를 부산에 설립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남노회는 심사참배 죄에 대한 자숙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고려신학교의 인정과 불인정의 문제로 반목이 격화되어 결국 교회의 분열로 귀결되었다”며 “총회가 세 차례나 경남법통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단독으로 총노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좀 더 인내를 가지고 몇 년 더 문전박대를 받더라도 총대 수용을 거듭 탄원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또 하나의 이슈는 주남선과 한상동이 총회 직영이 아닌 고려신학교를 사설로 설립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라며 “그 당시 총회의 직영 신학교는 조선신학교였다. 주남선과 한상동이 한국장로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조선신학교에 맡길 수 없어서 정통보수신학에 기초한 신실한 목회자와 전도인 양성을 위해 고려신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이것은 한상동이 옥중에서부터 쉬지 않고 간구한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지정하지 않은 한, 노회의 입학 추천이나 총회의 강도사 인허를 보장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는 지원자들에게 노회 추천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당회장 추천서를 받아 오도록 하고 졸업생들이 고려신학교에 대해 우호적인 노회들에게 강도사 인허를 신청하면서 점차 총회 인준 또는 직영 신학교로 키워 나갔다면 어떠했을까”라며 “이렇게 했다면 고신의 분열을 거치지 않고 오히려 고려신학교가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보수신학의 보루로 자리매김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했다.

이 교수는 “1952년 진주 성남교회에 경남법통노회 소속 목사 50명, 장로 37명이 모여 고신 총노회를 출범하였다. 1951년 경남노회 소속 교회는 모두 344개였는데 그중에 276개 교회가 이듬해 고신 총노회에 가입했다”며 “총회가 창립되던 1956년에는 568개의 교회로 급성장했다. 이는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회복에 앞장선 고신 교회의 순수한 열정과 회개에 이끌린 교회들이 고신에 편입함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1956년 이후 고신에 가입하는 교회들이 크게 감소한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전체 한국장로교회에 대한 고신의 신선한 영향력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비록 고신이 합동 총회에서 환원하여 지금까지 고신 교회로 계속 나뉘어 있지만 영구히 분리된 채로 남아 있기 위해 환원한 것은 아니다. 다시 합동한다면 그때처럼 미숙하게 불신과 갈등을 방치하지 않고 그때그때 합동을 유지하고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 다른 입장들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라며 “합동총회와 환원총회가 다시 합동할 수 있는 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상동은 환원한 고신이 분열로 치닫고 있던 1976년 1월 6일에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교단의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소천했다”며 “한상동은 고신 교회의 정체성 형성에 골격을 이루는 역사적 현장에 중심적 인물이었다. 그의 영적 감화와 결단은 고신이 어려운 고비를 넘을 때마다 문제를 타개해 나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자기 스스로 의도하고 기획함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고신 교회가 그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하겠다”고 했다.

그는 “먼저, 그의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있어서 신노회 조직 제안은 일제치하에서 핍박을 받던 교회적 상황에 맞지 않고, 오히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은밀히 모이는 예배 공동체룰 형성해 가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며 “ 장로교회가 외부의 핍박을 받을 때는 그 안에 내제되어 있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예배공동체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평소에 교회의 회중예배와 교육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가정예배와 교육을 진작시키고 믿음의 가정 또는 작은 신앙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를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둘째로 한상동을 포함한 출옥성도들이 제시한 교회회복의 5원칙에서 신사참배한 목사와 장로들의 회개와 자숙, 일시적 사역 중지 등을 정확하게 시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된다”며 “중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회개와 자숙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교회적 차원에서 공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수찬정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 뿐 아니라 성도들까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있을 때에 막연히 자숙과 회개를 권징의 방법으로 앞세우기보다 일정한 기간 성찬을 제한한 다음 다시 성찬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참된 영적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셋째로 주남선과 한상동이 교회의 목사 양성을 신사참배에 굴종한 조선신학교와 총회 교권주의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소위 사설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설립했고, 이것이 노회의 분열과 고신의 분열로 이어졌던 것을 보며 고려신학교가 직영이 아니면서도 교회로부터 원만한 인정을 받기까지 교회와 노회와 총회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면 좋았겠다고 반성하게 된다”며 “노회가 목사 고시와 안수를 관장하므로 직영신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고시와 검증을 거쳐서 수용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한 총회 안에 복수의 신학교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총회가 신학교를 너무 교권적으로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은 선교지에서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넷째로 합동 후에 한상동이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한 것과 그 후의 환원이 그의 분리주의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논의할 수 없는 주제는 아니고 필요한 주제이지만 그 주장으로 고신 교회가 마치 부끄러운 교회인 양 지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며 “한상동은 고신 교회의 형성이나 고려신학교의 복교 선언에 깊이 관여되어 있으나 분리된 상태를 영구화하려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때가 오면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고 합동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 고신 교회도 앞으로 교회 합동을 내다보면서 관계를 개선하고 서로의 예민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 있도록 예비적 논의들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견이나 입장 때문에 쉽게 분열로 치닫지 않고 합의점을 찾아 합동을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 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마지막 다섯째로 한상동과 송상석은 본의 아니게 고신 재건운동에 있어서 서로의 갈등 때문에 큰 폐해를 남기게 되었다”며 “교회가 너무 인물 중심으로 치우치지 않게 지도자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 중심으로 분파가 형성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의 정치적 분파가 노골화되어 갈등의 요인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이현철 교수(고신대 기독교교육학)가 ‘고신총회 70년, 신학교육에 대한 결의 사항 분석’, 배정훈(고신대 신학과 학과장)·신원하(고려신학대학원) 교수·김상윤 장로(경명학교장)가 ‘신학교육의 현실과 구조조정에 대해서’, 김하연 목사(대구삼승교회)가 ‘성경강해: 말씀을 통한 고신 신학교육의 방향성을 듣는다’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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