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종말론적 잔치 비유

1)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 눅 14:15-20)

(1) 천국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는 하늘나라의 잔치를 혼인 잔치(the Wedding Banquet) 비유로 설명하신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4).

혼인 잔치(the Wedding Banquet) 비유에서 임금이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배설하고 자기 동네에 속한 사람들을 초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각기 자기 일들이 바쁘다고 이 청함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은 임금의 초청을 수락하지 않고 심지어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b), 종들을 네거리에 보내어 만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에 손님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 온 자를 주인이 지적하고(마 22:12).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명한다(마 22:13).

이 비유는 예수의 복음 전도를 받기를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있으며, 복음을 유대인 전도에서 이방인 전도로 변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언하고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라는 구절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매우 구체적으로 함축하며,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마 22:9) 라는 구절은 이방인 선교를 예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하여 야고보가 첫 순교를 하는 등 박해를 받자 이들은 소아시아 안디옥으로 옮겨 거기서 교회를 시작한다. 이 교회가 바로 이방선교의 거점이 된 안디옥교회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언자적 통찰로 예시하면서 우시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연결되어 해석해야 한다.

이 비유는 예수는 이방인들을 복음에 초청하고 있으며 구원론이 교회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가르친다.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을 받으니 주인은 혼인잔치의 예복을 요구한다. 따라서 보편구원론(salvation universalism)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전해진다는 의미에서 복음 선포에서는 열려 있으나, 믿는 자만이 구원 약속이 효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최종 심판에서는 닫혀 있다. 초대받은 손님이 천국 잔치에 갔으나 예복이 없으니 잔치에서 쫓겨남을 당한다. 예복은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 아들에 대한 믿음, 성도의 합당한 거룩한 삶이다. 이 비유는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려 있으나 실제 구원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국한 된다는 구원 특수주의(salvation particularism)를 가르치고 있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城)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신다”(눅 19:41).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 성(城)과 그 주민의 비참한 운명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土屯)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눅 19:43-44).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눅 13:35a). 이러한 예수의 예언적 통찰은 그의 비유를 통하여 메시지로 나타난 것이다.

(2) 하나님 나라는 부유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큰 잔치 비유이지만 이를 기록한 마태와 누가의 뉘앙스는 다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큰 잔치 비유는 전반부는 비슷하나 후반부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네거리에서 만나는 누구든 초대하나 청(請)함을 받은 자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조건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잔치 개설 전에 예복입지 않은 자를 잔치 참여에서 배제시킨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마태는 전국 잔치에 모든 사람들이 초청받았으나 참석하는 조건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의 예복을 중요시한다

이에 반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잔치의 초청에 응하지 않는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들에 대하여 노하여 이들을 영구히 배제(排除)시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초대한다. 누가는 가난한 자들을 모두 초청하고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누가복음에서는 부한 자들이 청함에 응하지 않자 집 주인은 가난하고 소외자들을 조건없이 데리고 와서 잔치의 자리를 채우도록 한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4:21-24).

이 내용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교만한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배제되고 전혀 관계 없다고 생각된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초청된다는 교훈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유한 자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성직자들이 당연히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상관 없다고 생각된 이방인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초청받는 곳이다.

누가에 의하면 천국 잔치에는 선민이라는 교만의식에 사로잡힌 부유한 자들이나 종교인들은 자기들의 교만에 의하여 초청을 스스로 거부하여 들어가지 못하나, 일반적으로 제외되었다고 여겨지는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모든 이방인들이 초청받아 들어간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한계를 벗어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확산될 것으로 미리 알려준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준에는 아무런 외적 장벽이 있을 수 없다. 누가복음 비유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잔치에 참여할 자격인 예복에 관하여 묻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는 예복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지 않는다. 이는 예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선민이라는 기득권 의식에 안주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복음의 결별선언이다.

(3) 하나님 나라에는 누구든 초청되나 예복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민족적 경계선이나 정치적 울타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임금은 종들에게 명한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 14:21).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나 천국에 초청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강퍅한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를 벗어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비유에서 예수는 종말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경고한다. 하나님의 집(교회당)에 와 있다고 구원을 확인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예복이 있어야 한다. 예복이란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이미 창세기에서 범죄한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옷을 입힌 것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레위기에서는 속죄 제물은 아사셀 염소이다. 유대인 속죄일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오염된 하나님의 성소(지성소 회막 제단)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부정과 더러움에서 해방시키는 예식이 차례대로 거행된다. 이 예식에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순서가 등장한다. 속죄일은 두 기둥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제물로 잡은 염소의 피로 하나님의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짊어진 채 아사셀의 광야로 내보내는 예식이다. 광야로 내쫓기는 아사셀 염소는 죄의 흔적을 단번에 완전히 지워버리는 상징적 수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비유에서 임금이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배설하고 자기 나라에 속한 여러 방면의 사람들을 초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자들이 각기 자기 일들이 바쁘다고 이 청함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에 손님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예복 입지 않는 자를 보고 질문한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 초대받은 자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에 임금은 명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그러면서 임금은 말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하나님 나라에 대한 초대는 어느 누구도 제한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초대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은 천국잔치에 들어갈 예복이 있어야 한다.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말한다. 인류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 아들의 공로를 믿는 자만이 예복을 갖추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는 예수의 최종 선언은 일차적으로 예수를 거부한 불신앙과 불순종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동시에 네거리에서 무조건 초청을 받은 새 시대의 백성들,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된다. “제자 공동체에 속한 것 자체가 궁극적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복이 있어야 한다. 연회장에서의 규범, 곧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 요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훌륭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고대 중동에서 흰 옷은 세마포로 만든 옷이었다.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다(계 19:7). 더러워진 세마포는 어린 양의 피로 깨꿋하게 된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하).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 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참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는 제한 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파는 가롯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이 흔들리는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뒤를 끈질기게 쫓는 것에 대하여 다음같이 해석한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9). 택하신 성도의 견인의 은혜가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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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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