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수상한 파라다이스'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군무를 추는 무용수 18명에게는 전반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 무대 뒤편에는 흡사 포탄이 뚫고 지나가면서 생긴 듯한 다섯 개 커다란 구멍이 있는 장벽이 서 있다. 공포스러운 모습이다. 무대공간을 스며들며 채우는 음악은 미니멀하다. 아르보 패르트나 필립 글래스의 단순한 형태의 음악이 반복되고, 노이즈 성격의 음향이 계속 같은 소리를 낸다. 무용수의 몸동작, 무대, 음악과 음향을 통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곳에서 왠지 곧 큰일이 일어나거나, 암흑 속으로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금방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무용 '수상한 파라다이스'는 남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다. 국립현대무용단(예술감독 홍승엽) 신작인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물리적 또는 상상적 공간은 DMZ다. 안무가인 홍승엽은 이곳에서 대립과 평화가, 영혼과 생명이 공존하는 모순성을 발견한다. 생태계의 보고로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지닌 파라다이스로 보이지만 깊은 상처를 안은 곳 DMZ. 그는 이 지대를 우리 민족의 '업보'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수상한 파라다이스'에서 춤으로 풀어낸다.

군무의 앙상블이 좋다. (사진=강일중)

민족이란 개념이 들어가서인지 작품은 군무 중심이다. 그러면서도 앙상블이 아주 좋다. 돌리고, 비틀고, 뻗고, 꺾고, 뛰고, 던지는 모든 동작이 전체적으로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대무용에서 16명 또는 18명이나 되는 많은 무용수가 한꺼번에 무대에 나와 좋은 앙상블을 만들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 중간 2인무 또는 3인무 등의 춤에서도 몸의 유연함과 파워가 함께 느껴진다. 테크닉을 중시하는 안무가의 스타일을 반영해 무용수의 개인 기량이 충분히 발휘된 듯 하다.
이 작품이 갖는 큰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의 강인함과 힘이 부각된다는 점이다. 막을 열고 닫는 장면을 제외하고 진혼ㆍ업보ㆍ순응ㆍ불편한 조화ㆍ전쟁ㆍ연민ㆍ기록의 7개 장면으로 구성된 작품 초반부에는 여자 무용수들이 남자 무용수를 한 명씩 끌고 나와 느린 동작으로 이리저리 밀치는 식으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역시 '업보'라고 해석해야 할까? DMZ라는 상황을 만들어낸 남성지배 사회를 여성이 응징하는 듯한 느낌이다.

중간에는 다시 남자 무용수들이 바닥을 포복하는 상태로 여자 무용수를 등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있다. 한데 여자 무용수는 용맹스런 모습이다. 흡사 말 또는 전차(戰車)를 타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여전사(女戰士)를 보는 것 같다. 작품이 끝나갈 무렵 천장에 달린 16개 거대하고 위압적인 느낌의 돌더미가 내려오면서 아래 있던 무용수의 몸을 짓누른다. 이 장면에서 혼자 흥겨운 라틴음악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무용수는 여자다.

(사진=강일중)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주는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를 크게 강화하는 것은 음악과 음향이다. 헨릭 구레츠키의 교향곡 제3번 '슬픔의 노래'('진혼' 장면), 필립 글래스의 교향곡 제3번 3악장('순응' 장면) 등이 비탄과 장중함을 안겨주는가 하면, '전쟁' 장면에서는 포탄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은 음향이 공포감을 전한다. '불편한 느낌' 장면에서 엉덩이에 의자를 붙이고 나온 첼리스트 김재준의 라이브 첼로 연주도 장면은 깊이를 더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업보'의 개념이 내재한 추상성에도 무대에서 춤과 무대장치, 음악과 음향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운데 구체성을 드러내면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몸과 무대 이미지만으로도 작품성이 느껴진다.

아쉬운 부분은 이 작품이 부분적으로 지닌 다른 작품 속의 유사 이미지다. "어! 이 장면 어디서 본 건데…?" 하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수상한 파라다이스'는 남녀 무용수 18명이 일렬로 서서 남자 무용수 한 명만 제외하고 흥겨운 라틴음악의 차차차 리듬에 맞춰 제멋대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이미지는 2006년 가을 유니버설발레단이 세계적인 명성의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을 초청해 국내 관객에게 선보인 나하린의 '마이너스 7'의 첫 부분을 연상케 한다. 그 작품 역시 많은 남녀 무용수가 라틴음악의 차차차 리듬에 맞춰 무대 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막을 연다.

'수상한 파라다이스'에서 또 눈에 띄는 장면은 '순응' 부분에 나오는 9명의 군무다. 바흐의 바이올린협주곡 E장조 3악장 음악과 함께하는 무용수들의 몸동작은 올초 국립현대무용단의 창단작품으로 선보인 '블랙박스'(홍승엽)에 나오는 '아큐'의 한 장면(10명 군무)을 떠오르게 한다. 세부적인 몸동작은 달랐지만 군무 전체가 주는 이미지는 서로 빼닮았다.

다른 하나는 '진혼' 부분에 나오는 분필로 무대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 이 또한 똑같지는 않지만 '블랙박스'에 나오는 장면과 개념이 같다. 현대국립무용단은 현대무용의 대중화에 특히 관심이 많은 단체다. 적지 않은 무용 전문가가 다소 비판적인 시선을 보였지만 지난번 '블랙박스' 공연은 일반관객으로부터는 작품성과 재미 모두에서 큰 호응을 얻었었다. 만약 어떤 관객이 그때 그 작품을 보고 현대무용에 매료돼 이번에 다시 '수상한 파라다이스'를 보았다면 비슷한 이미지의 춤 동작을 보고 반가웠을지, 식상했을지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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