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한 목자 비유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이웃 사랑

(1)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선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비유는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어느 율법사가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생각된 예수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 25b). 율법사는 예수가 이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자 하였다. 예수는 율법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통하여 스스로 대답하도록 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율법사는 정확하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웃 사랑이라는 토라의 교훈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율법사는 예수에게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질문한다. 이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 30-37).

예수는 비유에서 유대사회의 지도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당연히 돌봐줄 이웃이라고 생각한 통념을 깨뜨리고 전혀 이웃으로 생각치 않았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자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진정한 이웃이란 단지 고향이 같다거나, 같은 학교를 나왔다거나, 인종이 같다거나, 피부색이 같다거나, 가문이 같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족이 다루고, 언어가 다르고, 성이 다르고, 고향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가문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고, 대화하고,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자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예수 자신이야 말로 당시 유대사회에서 변두리 출신으로 병든 자와 헐벗고 소외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2) 진정한 신앙은 이웃 사랑 실천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으로 결속된 공동체로서 이웃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는 동족이었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누구나 서로에게 책임이 있으며 공동체 전체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각 개인은 자기 동족을 전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처럼 생각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섞여 함께 사는 이주민만 동족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단자, 밀고자, 반역자들은 이웃으로 간주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합인으로 멸시받았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시하신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노상 강도짓이 자주 발생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았으나 지나쳐 버린다. 이들은 전문가들로서 종교적인 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신앙 문제와 율법 문제를 놓고 서로 논쟁하며 서로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곤궁을 간과하거나 그것을 보고도 못본체 지나쳐 버리는 위선(僞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상처에 싸매어주고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교의 모든 종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경멸을 당했다. 비유는 이런 사마리아인이 올바른 일을 행하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의로운 일을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뽐내는 집단 밖에서도 하나님의 뜻(자비와 긍휼)을 그들보다 훨씬 더 잘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교훈해준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잘 알았으나 율법의 기본 정신은 조항을 외우거나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단지 율법 조항을 외우고 적용하는 자가 아니라 이웃의 곤경을 보고 이를 도우는 사랑과 긍훌의 마음을 가지는 자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긍휼히 여기고 그를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이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3)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리적 인간 이전에 참된 이웃으로 나타나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진정한 신앙인이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율법을 공부하고 외우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적용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종교적이고 교리적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이웃 사랑의 교리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소위 보수정통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는 성경 제일을 내세우고 하나님 주권을 내세우나 그들의 삶으로는 인본주의적으로 교단 연합 사업 선거에 돈봉투를 돌리고 사람들을 돈봉투로 회유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교단 일(심지어 신학대 총학장 선임)을 하는데 의당히 촌지(寸志)를 요구하고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권무술수를 사용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보수정통주의자라고 하나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심판날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자신들이 교리적으로 보수 정통을 내세우는 자들은 혹시나 이러한 실천적 무신론적 삶을 살지 않는가 깊이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라고 증언한다. 바울이 증언하는 것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표적과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삼층천의 비밀을 안다고 하드라도 그에게 성화(聖化)된 겸손과 자기 비움이 없으며, 이웃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의 역사의 본질은 표적이나 능력을 통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항상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철저한 관리를 통한 자기 비움과 겸손이요 섬김이다.

(4) 인류동포주의

여기서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특권 계층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멸시를 받은 무명의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사회에서는 이방인으로 취급받았고. 강도만난 자를 구해줄 아무런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만나 쓰러진 자를 불쌍히 보고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를 주막에 데러다 재우고 그의 숙박비까지 부담하여 그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사마리아인은 비록 이방인이나 예수께서 교훈하신 원수 사랑 계명을 실천한 자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b-28).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지만 내면의 긍휼과 사랑의 명령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익명의 다른 사람, 강도에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아가페의 실천자였다. 아가페란 “내가 해준 만큼 너도 해달라”(do ut des)는 등가 원칙을 깨뜨리고, 조건 없이 어려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긍휼행위다. 사마리아인은 아가페를 실천하였다. 그의 행위는 모든 인습적인 관행과 규범을 초월하였다. 이러한 자에게 예수가 말씀하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이라는 새로운 규범이 타당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규범이다. 이 새로운 규범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도움이 필요로 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인류동포주의(cosmopolitanism)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는 이웃 사랑, 더 크게는 인류동포주의로서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 지구촌 사회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기업의 공세는 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이어 많은 토착민들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만들어 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 속에서 많은 토착민들이 저들의 토지와 삶의 근거를 상실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신매매, 섹스관광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오늘날 기업하는 기독실업인들은 저들이 신식민지 수탈의 대상이 아니라 개발과 발전의 혜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류애 경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각 나라의 정부기구와 대기업도 이들 저개발국가들이 개발과 발전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이들 노동력이 착취되지 않고 생존권과 인권이 존중되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기독론적 해석: 이웃 사랑의 동력자로서의 예수는 모든 종교를 능가

우리들은 교부들이 이미 시도한 바같이 이 비유를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예수 자신을 가르킨다고 말할 수 있다. 강도만나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사탄에게 침탈당한 인간 자신이다. 그리고 그를 구해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은 당시에 제사장이나 레위인 등 종교 특권층으로부터 경멸받았던 이방인이었다. 예수는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주변 지역으로 있었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가난한 농촌출신으로서 정규적인 율법공부도 하지 못한 촌부(村夫)였다.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을 공부했으나 율법이라는 제도에 얽매어 있었다. 이처럼 사탄에 의하여 강탈당하여 하나님 형상을 상실하여 쓰러진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령의 기름과 보혈의 포도주를 공급하여 살리고 교회라는 주막에 데리고 가서 쉬게 하고 중생의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해준 것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은 진정한 목자다.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 5:44)고 이웃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그의 생명을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주셔서 그의 생애 자체가 아가페 사랑의 실천이었다.

참 빛이 어두움에 비쳤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강도만난 자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참 빛을 비춰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초자연적 빛인 참 빛을 받아 새 생명, 광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참 빛을 받아 새 생명의 빛을 얻는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빛인 참 빛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 이웃 사랑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처소에서 낮선 사람들에게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이 사랑의 빛을 기독교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타종교인들(힌두교인, 무슬림, 불교인, 무교인, 유교인, 도교인, 각종 신비종교인들 등)에게도 비쳐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교리는 바른 가르침이긴 하나 저들을 설득할 수 없으나 우리가 가진 이웃 사랑은 보편성을 지니고 저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신자들이 실천하는 이웃 사랑은 타종교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성에 새로운 점화(點火)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여기에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 간의 대화의 새로운 길이 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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